[이상국 에세이]찬란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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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찬란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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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3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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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마지막에 웃는 게 가장 잘 웃는 거라는 말이 맞을까.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의 소설 ‘라모의 조카’ 마지막 줄에 나오는 이 말을 믿었다. 굳게 믿었다.

늦가을 아침, 황금빛 몽땅 떨구어 놓고 나신(裸身)으로 선 은행나무를 잊지 못한다.

평생 기쁨이란 걸 모르고 살았다. 초등학생 때 우등상을 타도 더 잘해 훌륭한 사람이 된 후에 웃을 일이다, 기뻐하기엔 이르다고 작은 주먹 불끈 쥐고 맹세했다.

아카시아꽃 필 때, 강물에 피라미 떼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울굿불굿 피라미 수컷은 혼인 색으로 불노지가 되어 힘차게 뛰어 오르는 순간들.

시험에서 1등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2, 3등만 해도 아버지 엄마, 형, 누이들이 축하해주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녀석들이 병신으로 보였다. 2, 3등 정도에서 웃지 않았다. 1등을 할 때 웃기로 하고 보류했으니까. 가까스로 1등을 한 때에도 웃지 않았다. 이번에도 보류다. 더 큰 시험. 제대로 된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웃으리라.

벚꽃은 관능의 꽃이다. 온몸 꽃으로 휘감고 피우고 떨어뜨리는 장관은 발정난 개 아

니라도 관능에 몸서리 쳐야 한다. 해마다 피는 벚꽃 앞에 번쩍이는 관능의 순간.

어느 날 사무관으로 진급한 친구의 입이 쫙 찍어진 얼굴을 보았다. 말 그대로 입이 귀에 걸렸다. 천박했다. 나는 그렇게 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언뜻 스친 여인, 한 눈에 반했다. 여인에게 눈 고정시키고 걸었다. 한 발짝 지나면다시는 못 볼 여인. 돌아보니 여인은 마주 보고 있었다. 주르륵 달려가 “차나 한 잔….” 해야할 놓쳐버린 순간.

공무원의 꽃이라 하는 사무관 진급을 했다. 표정 없는 얼굴에 웃음이 나올 리 없다. 보다 못한 과장이 한마디 한다. “이 사람 진급을 해도 기쁘지 않은 모양이야. 웃을 줄 모르니.” 50여 년 굳은 얼굴에 웃음이 피겠는가. 마지막에 웃자던 웃음마저 영영 잃어버렸다.

내 젊은 날의 싱싱했던 육신과 기억은 사라졌다. 잡아보지 못한 찬란한 순간들, 흔한 일상이거니 스쳐 지난 짜릿한 감촉들 ― 은행잎과 수평선에 팽팽히 뛰어 오르던 은빛 물고기, 낙조 속의 여인.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찰나의 기억들.

이젠, 운 좋아 섹시한 여자를 만난다 해도 피카소처럼 커다란 파라솔을 들 기력조차 없다.

친구 아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버스를 탔다. 갈 적 올 적 뒷자리에선 중, 고등학생 시절 악동으로 천방지축 날 뛰던 청춘의 날들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때 그 여학생 어디서 무얼 할까. …그 녀석 맷집도 좋았지. …그 친구 미국에 가서 죽었대. 나는 담배를 중학교 때 배웠다. 왜 여기서 죽지, 내 담배는 선생도 이해를 했어. 미국까지 가서 죽어. 선생이 학생 담배 피우는 걸 이해하다니. 미쳤냐. 몸매 죽여줬는데. 마누라 초사지….

서기관으로 퇴직한 친구가 “나는 할 얘기가 하나도 없어. 학고 다닐 때 죽자고 공부 하느라 연애고 싸움이고 할 틈이 없었어”하고 웃는다. 이 친구나 나나 공부만 했고, 공무원으로 공직에 충성하느라 노는 게 무언지도 모른다. 바둑, 장기, 영화, 노래, 춤, 고스톱까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다만 공무원 9급으로 시작해 사무관이 되는 확률이 1/100이라는데, 그 사무관까지 했으니 성공한 걸까.

내가 묻는다. “우리가 잘 산 걸까. 쟤네들이 잘 산 걸까.”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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