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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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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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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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기나긴 직장 생활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마감 날짜를 잡아 놓았다. 그러나 웬걸, 아내가 선수 쳐 며칠 더 견디기로 약조한 모양이다. 그래 며칠 상관에 한 달 봉급 더 타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벌레 씹은 기분이고 빳빳한 자존심에 구김살이 져 면치 않다.

따지고 보니 아내보다 돈에 자유롭지 못한 내가 미운거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언뜻 처남의 얼굴이 스친다. 큰 일 때마다 누이들 눈치만 살피고 결정을 못 내리는 우유부단함. 일곱 누이 아래 자랐으니 남자 구실을 했을까. 사사건건 누이들이 참견하고 결정을 내리니, 자기 결정을 포기하는데 내가 그 꼴이다.

어차피 떠날 양이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서로 편하고 행복하다. 출퇴근 길에 부딪히는 직원들이나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니, 도둑질하고 언제 들통날까 전전긍긍하는 꼴이니 체면이 말씀이 아니다.

아내에게 통장과 도장을 맡기고 살림살이에 참견을 않으니, 업무에 충실할 수 있어 좋긴 한데 가정사는 모래알처럼 손바닥에서 빠져나가, 자식 놈들이 오랜만에 집에 와도 아비보다 어미와 밤을 세워 소곤거리다 아침이면 훌쩍 떠난다.

기계가 인간의 힘을 대신 하던 순간부터 남자는 밀려난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트랙터를 몰고 논으로 들어가는 여자 운전사에 놀라 브레이크를 밟고 보니 친구 부인이다. 술에 곤죽이 되어 택시로 집에 닿아보니 운전사가 여자고, 관광버스에 오르니 운전대를 잡은 손이 여자다. 포크레인에서 비행기까지. 부시 대통령과 같이 북한을 논하기 위해 내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 여자다.

말도 변한다. 아내의 전화 첫 인사가 “안녕하십니까”로 변하고 여류 문인들의 E-Mail 첫 인사도 “안녕하십니까”로 변하는가 했더니, 나의 인사말은 어느 새 “안녕하세요”로 움추러 들었다. 유니섹스니, 노랑 머리, 빨간 머리, 찢어진 청바지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미 오래된 간 큰 남자 시리즈와 고개 숙인 남자가 못마땅해 분통을 터트렸지만 어느 틈에 내가 이렇게 변했을까.

여자 바지 지퍼가 옆구리에서 당당하게 정면으로 돌아 선 것은 오래고, 어느 틈에 남자 팬티에 구멍이 없어졌다. 소변기와 대면해 혁대를 끄르고 바지춤과 팬티를 내려 소변을 보자니 가뜩이나 끌리는 바지가랑이가 질펀한 화장실 바닥에 내려앉아 여간 고역이 아니다.

공무원은 박봉에 시달린다. 직원 아내는 학원 강사로 남자 봉급보다 많아 남자의 봉급은 일상사 작은 부분만 책임지고 큰 돈은 여자 몫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 시중이며 가정사는 남자 몫이 되어 퇴근길에 술 한 잔하자 해도 사양할 수밖에.

정치 공무원 솎아내기에서 군 장성(軍將星)의 아내가 좌충우돌하며 정가(政街)를 뛰던 모습을 보고 혀를 찬 적이 있다. 역사가 치마폭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이 맞는지.

여직원과 불미한 사건으로 공직을 떠난 직원이 있다. 아내가 미주알고주알 캐어내 일파만파를 만들어 놓고도 사표만 내면 이혼한다고 펄펄 뛰는 걸 무시하고 군소리 없이 사표를 제출한 그가 왜 부러우냐.

떠나자니 사소한 일에 얽매인 나는 뭐냐.

남자여, 탁탁 털고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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