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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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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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13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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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피 빼러 가자.” 이 방 저 방 소리쳐 보지만 들은 척도 않아 나이 많은 이 과장과 단 둘이 헌혈을 한다. 인색한 직원들이 야속해 화풀이 삼아 ‘헌혈’보다 ‘피 빼러 가자’고 악을 쓴다.

피도 젊은 피가 좋지, 늙은 피는 괄세를 받을 것 같아 늙은이 피도 필요하냐고 물으니 64세까지 받는다니 다행이다.

말라리아 발생 지역에 다녀온 경험을 물어, 태국을 다녀왔다고 하니 증상이 없었느냐 꼬치꼬치 묻는다. 키니네를 먹어 가며 여행을 했고, 호텔에 머물렀으니 말라리아 걱정은 없지만 혹여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그만 두려니 그것도 말린다.

지난여름, 장마가 휩쓸고 간 수해지역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해 봉사활동을 했던 많은 군인들이 헌혈을 못해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외국 여행이 잦다보니 전염병도 국제화다. 10여 년 전 큰아들이 선교 활동으로 케냐를 간다는데 그 때만 해도 에이즈가 신종 전염병으로 공포의 분위기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라 원산지 아프리카 여행을 허락할 수가 있는가. 어려워 등교시간 임박해 학용품 값을 달라고 발을 동동 굴러, 아버님의 따질 여유를 없앴지만, 이놈은 한 수 더 떠 항공료는 교회재단에서 냈고 안 가면 다른 사람이 갈 수도 없어 축만 내게 되며, 활동에 차질을 빚어 서클에 누를 끼친다는 등, 이미 결정은 다 되었으니 허락만 하라고 졸라대는데 도리 없이 보냈고, 탈 없이 돌아왔다.

믿고 살아야 한다. 헌혈 주사 바늘로 감염이 된다는 말은 옛 이야기이고, 헌혈로 몸 축날까 염려하는 것도 기우다. 염색체 지도를 읽고, 인간복제까지 한다는 눈부신 21세기가 아닌가.

피가 부족해 죽어가는 소녀가 있었다. 어머니는 수혈을 금지하는 교회의 신자라 딸의 수혈을 완강히 거부하고 기도에 매달리지만 속수무책이다.

의사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보호자와의 약속을 깨고, 소녀를 소생시킨다. 죽어가던 딸이 “엄마”를 부르자 여인은 수혈을 따질 생각도 못하고 끌어안고 통곡한다.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30년 전 영화의 한 장면이다.

70년대만 해도 매혈로 가계를 꾸리는 여인, 학비를 조달하는 대학생들도 많았지만 이젠 무상으로 헌혈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름답다. 그러나 인색한 사람들은 여간한 고집이 아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요, 불감훼상 효지시야(不敢毁傷 孝之始也)를 들먹이며 피를 뽑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맞선다.

처음 헌혈을 할 때, 굵은 바늘에 대한 공포, 헌혈로 인한 감염, 출혈이란 강박관념들을 내키지 않았지만. 하고나니 홀가분하고, 꺼져가는 생명의 심지를 돋군다는 자부심이 들며, 몸도 가뿐해져 기회만 있으면 헌혈을 한다. 고정관념을 깨고 나면 고집은 봄눈 녹듯 하는 것을.

생각대로라면 이놈 저놈 잡아다가 강제로 헌혈 시키고, “어때 죽을 것 같냐. 네가 죽어 가는 생병을 살렸어”라고 호통을 치고 싶다.

Rh 음성 혈액형은 미국에서는 20%, 우리나라에서는 1,000명중 1~3명 정도로 드물다. 매스컴을 통해 Rh 음성혈액을 찾는다는 애절한 보도를 듣는다.

막내아들의 혈액형이 네가티브라 이놈만 보면 사고라도 겪을까 전전긍긍하다 RH­ 협회를 찾았더니 살기 위한 모임이라 매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인다. 본인들은 물론이요, 부모까지 장사진을 치고, 회원이 사고를 당하면 만사 제쳐 놓고 오밤중이라도 달려가 수혈하는 걸 보면 혈맹이 따로 없다.

“내 피는 안 된데요.” 헌혈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여직원이 미안해 어쩌죠 하는 표정이다. 묽은 피는 헌혈을 받지 않아 거부당한 모양이다. 늙은이도 하는 헌혈을 젊디젊은 자기는 못해 부끄러운 눈치다.

왜 이 여자가 깨물어 주고 싶도록 예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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