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낯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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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낯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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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2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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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중, 2부 ‘유령들’에서 주인공 블루는 사립탐정으로, 화이트로부터 블랙을 감시해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추리 소설이지만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정체성을 찾는 소설이다.

주인공 블루와 블랙이 마주 앉아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집을 끌어들여 액자 소설로 담화 중이다. 웨이크필드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장난을 치려고 며칠 간 출장을 떠나지만 골목을 돌아 방 하나 세내어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본다. 사흘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더 머물다 몇 달이 지나 해가 바뀐다. 몇 해 머물다 보니, 자기 집에 초상이 났다. 죽은 자는 웨이크필드 자기 자신이다. 장례가 끝나고 몇 년 지나 아내와 길거리에서 마주치지만 아내는 알아보지 못한다. 세월이 흘렀고, 늙은 수염은 하얗게 세었으며 기력이 쇠잔해졌다. 눈 내리는 밤, 자기 집 앞을 지나다 창 안의 따뜻한 침실과 식탁을 들여다본다. 이젠 돌아가 식탁에 앉고 싶다. 웨이크필드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소설이 끝난다.

나는 누구일까.

공군 하사관으로 군대 생활을 6년 했다. 제대하는 날 무척 울었다. 내가 있고 군대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제복과 계급장과 군화와 군모를 사랑했고, 자랑했다. 내가 있고 군대가 있다면, 내가 없는 군대는 망가지든가 사라지든가 군대라는 시스템 작동에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군대는 잘만 돌아간다. 내가 떠난 자리는 누군가 금방 차지하고 앉아 내가 하던 일을 훌륭하고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다. 내가 있던 날보다 더욱 빛나게.

군대란 구조물의 벽돌 한 장에 불과했던 나.

3개월 놀고 먹다 말단 면서기로 취직해, 30여년 공무원 생활을 했다. 면서기에서 군청 직원으로 서기에서 주사로 주사에서 사무관으로, 차석에서 팀장으로, 팀장에서 과장으로…. 그리고 퇴직했다.

7, 80년대. 누에치기, 한우생사(韓牛生飼), 퇴비독려, 조춘경(早春耕), 병충해 방제, 논보리 심기….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실패한 정책에 왜 몸 달궈 에너지를 낭비했는지.

도대체 우리를 줄달음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3·15 부정 선거만 잘못된 게 아니다. 유신 헌법만 잘못된 게 아니다.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이 하나 둘이냐. 조국 근대화란 미명하에 스러져간 사소한 양심들. 그 많은 날들과 산더미처럼 쌓인 보고서와 복명서, 그리고 행적들. 우리들이 움직인 시간 동안 수도 없이 발생했다 사라지고 다시 만들어져 투입되고 회유되고 강박으로 내몰린 것은 국가 중심주의란 열차에 탄 죄 때문일까.

잘못인 줄 알면서도 왜곡에 앞장서고 싶었던 것은 조국이란 원심력에 속수무책이었던 한 세대 무리들의 속성 때문일까.

뉴욕 3부작 유령들 말미에서 블루와 블랙은 자신들 존재에 대하여 다툰다. 블랙은 자살로 실존을 마감하려한다. 그 앞에 블루는 자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블랙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천만에 자네는 내게 고용되는 순간 자네 존재는 사라졌어. 죽도록 블랙을 패 버리고 떠나는 블루가 방문을 여는 순간 이야기는 끝.

공무원으로 처음 들어가던 날, 골프공이 골프채에 맞아 허공 중에 아스라이 한 개 점이 되어 사라지듯 나는 사라졌다. 퇴직하는 날 사라졌던 공이 그린에 떨어져 홀을 찾아 굴러가듯 그렇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나. 내가 왜 낯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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