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칼라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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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칼라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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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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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지난번 IMF에 겹쳐 우루과이 라운드니 WTO니, 개방으로 수입쌀이 들어오면 값이 폭락할 것이라며 농민들은 걱정이 태산 같고 기술진들은 경쟁 대체 품종을 개발하느라 난리를 치뤘다.

농업기술 센터 견학을 했다. 몇 년 전부터 여주지방 특산물이 땅콩에서 고구마로 바뀌어 관심이 있었는데, 고구마 밭에는 빨간 고구마, 노란 고구마, 하얀 고구마가 뒹굴고 있다. 얼마 전 일본에 칼라 쌀이 나와 빨간 밥을 먹으면 배설물로 빨갛고 파란 밥을 먹으면 파란 배설물을 낸다고 해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칼라고구마가 있을 줄이야.

빨간 고구마 ― 붉다 못해 자주색이다. 토막을 내니 하얀 진이 나온다. 색은 자주색이지만 진은 하얀 게 신기하다. 어려서 검둥이 소년의 피는 검을 것이라며 강제로 상처를 낸 붉은 피를 확인하던 악동들이 생각난다. 생명의 본질은 영원한 것. 이 순간에도 전쟁과 기아와 혼혈의 아픔이 칼날같이 스친다. 아직도 헐벗고 굶주리는 어린이들이 세계도처에 지천이다. 영농기술의 발달로 전인구가 먹고도 남을 식량을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호기심은 생각의 천착을 접고 고구마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맛은 없단다. 호텔이나 고급 식당에서 차장용, 또는 식용 색소를 내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노란 고구마는 날로 먹어야 한다. 한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냉장으로 저장했다 먹으면 옛날 무우 맛에 비길 바 아니라고 한다.

집에 가지고 와, 자랑하니 어머니는 “노랑 고구마, 내가 가져 온 것도 있는데.” 토막을 내어보니 또 다른 품종이다. 기술센터 것은 원형의 무늬를 이루며 노란빛을 띄는데 이것은 아예 속속들이 노랑 일색이다. 여러 가지 색깔을 낼 수 있다니. 신기한 세상이다.

옥수수 밭에는 사료용에서 찰옥수수, 슈퍼 옥수수, 칼라 옥수수는 물론 팝콘까지 자라고, 하나의 옥수수 대에서 빨강, 파랑, 노랑, 가지각색 ― 칼라 옥수수가 영근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를 멋대로 갖고 노는 꼴이다. 참으로 방자한 동물이 인간이 아닐까.

돌아서는데, 한 쪽 구석에 초라한 잡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옥수수의 원조들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원주 옥수수를 수차례 교잡하는데 무려 20여 년이 걸리며, 그 결과로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누가 문명을 개탄하는가. 환경파괴, 게놈, 오존층, 환경 호르몬 등의 폐해가 문명의 역작용인 것은 알지만 풍요의 세상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초가집과 청솔가지를 때던 아궁이와 석유등잔 오막살이는 향수에 불과하지, 들어가 살 집은 아니다.

새만금 간척지가 개발이냐 보존이냐에서 개발 쪽으로 결정이 났다는 보도를 듣고 개운했던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문명이 없었다면 원시생활의 연속이며 동물과 무엇이 다르랴. 개발과 보존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선택으로,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루한 싸움에서 협력기구로 변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보잘 것 없는 원시에서 슈퍼까지 전이되는 옥수수 유전자 불멸의 연속성에 숙연해지고, 20여 년의 장구한 세월, 집요하게 매달리는 연구진에게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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