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화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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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화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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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0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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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아버지는 젊어서 차린 구멍가게가 잘돼 많은 돈을 버셨지만 말년에 모두 잃으셨다. 잃어버린 돈을 복구하고자 방앗간에서 자전거포로, 빵집에서 석유가게로 전력투구하셨지만 모두 허사가 되곤 했다. 자식들이 공무원이 되어 부러움을 사셨지만, 옛날의 부(富)와 명성(名聲)을 찾지 못해 속을 썩이시곤 했다. 더욱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것은 나의 불효였을 것이다. 군대를 막 제대했을 때였을까, 가세(家勢)가 기울어 대학을 포기하고 만취하여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워 “그 많던 재산,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하고 대들었으니. 그날 밤, 나는 골아 떨어져 늘어지게 잠을 잤으나, 아버지는 한잠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니, 그 불효 죽는 날까지 벗어날 길 없다. 아버지는 아직도 부(富)와 명성(名聲)을 잊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 이젠 유골도 깨끗이 닦아 드렸으니 고이 잠드시길….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

영국에서 최초 인류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다. 문명화된 인류 최초의 발상지가 영국이라는 자부심도 컸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것은 고릴라의 두개골과 인간의 것을 맞추어 놓은 것으로 판명되어 사기극으로 끝나고, 믿고 싶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두개골을 진실로 받아 들였다. 허영과 아집, 명예와 수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진실만 남는다. 진실은 정직한 자의 몫이다.

치열하게 사는 것은 아름답다. 저 앵무조개와 갑오징어는 치열하게 살다간 생물들이 아닌가. 찬란한 빛과 아름다운 곡선. 자손 번식이란 수단보다 육신으로 남아 있는 화석들.

인간은 화석을 만들기 위하여 오랜 세월을 소모했다. 자신을 묘사한 고대인의 동굴 벽화에서 상형문자, 쐐기문자. 0(Zero)의 발견까지 3,000년이나 걸렸지만, 사진과 비디오, 최근엔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 입체영상까지 만든다.

몇 년 후에는 제사를 지내기보다 컴퓨터로 가상현실을 만들어 수시로 조상과 만나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두뇌는 작은 칩에 집적(集積)되어 자손들에게 과거를 이야기하고 훈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후손들에게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까. 차라리 화석으로 남아 뼈다귀만 보여주는 행운이 있기를.

나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20년이라면,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20년은 턱도 없을 것 같아 조바심친다. 사사건건 확실한 판단도 서지 않을뿐더러, 눈치가 앞장을 서니, 산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도 생각해보지만 마음뿐이다.

우리는 많은 화석들을 가까이 두고 산다. 플다크의 영웅전, 성서, 일리어드, 오디세이. 세종대왕. 어떤 때는 모세와 람세스를 한 책장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기는커녕, 엉뚱한 일을 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일하지 않고 남의 공을 나의 공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하찮은 일로 나를 확대 치장하기도 해, 치욕스런 내가 미워 28살에 생체 실험으로 일제 형무소에서 죽어간 윤동주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를 읽는다.

독일에선 도심 한가운데 함마맨을 세워 쉴새없이 함마를 두드리게 한다. 근면한 국민을 요구하는 정부의 의도로 읽었는데 인간답게 살라는 뜻으로 보인다. 퇴근 할 때면, 일하지 못한 하루가 후회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의 연장이 될까봐 오늘이 겁난다. 요즘 같아선 이상(李霜)의 ‘날개’에서 “육신이 흐느적거리도록 노동을 하고 나면 정신은 은화처럼 맑다”라는 말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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