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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별들의 역사, 그리고 나
  • 중앙신문
  • 승인 2018.12.0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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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자연계에서 가장 취약한 동물이 사람이다. 그러나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세계의 고민을 걸머지고 외롭게 떠도는 섬(비오는 날 따로따로 걷는 우산을 보면 영락없이 외로운 섬이다)이 되기도 하고, 밤하늘 찬란히 빛나는 별이기도 하며, 우주를 정복하는 거인(巨人)이 되기도 한다.

아무렇지도 않던 육친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 있다.

원고를 녹음해 카세트를 틀면 분명 내 목소리지만 해외에 나가 근무 중인 동생의 육성으로 들려 깜짝 놀란다. 30여 년 전 선배가 자신의 가발 공장에서 “자네는 예쁘게 생겼으니 가발을 쓰면 여자로 보이겠어”하며 짓궂은 장난 끝에 가발을 씌웠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나는 온데간데 없고 놀란 누이의 얼굴만 남아 있다. 그런 순간마다 경악한다. ‘유전’이란 원시 아날로그가 최첨단 디지털 뺨치듯 형제자매를 복사해 놓다니. 형제가 아무리 닮았다 해도 부자 관계만 하겠는가. 그러나 아들 셋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나를 닮은 구석이 없다. 그렇다고 아내를 의심하거나 유전자 감식을 생각해 본적도 없다. 세대(世代)를 건너 뛰어 발현되는 격세유전(隔世遺傳) - 나와 아내의 조상님들 중 누대에 걸쳐 나타나지 못했던 어느 불쌍한 분의 유전자가 아들의 몸을 빌려 발현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랑하고 싶은 나를 형제의 목소리에서 만날 땐 반갑고, 보기 싫은 나의 몰골을 누이의 얼굴로 만나면 미울 때가 있다. 언제나 나는 형제자매가 되고, 형제자매는 내가되어 반기고 미워하며 마주 선 거울이 된다.

태초부터 나를 만들기 위하여 동원된 조상님들이 도대체 몇 분일까. 1세대에 아버지와 어머니 2분. 2세대에 4분. 3세대에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8분, 4세대의 16분. 5세대 32, 64 ……로 이어지는 등비수열. 경주 이씨 39세 손이니 초항을 2로, 공비는 2, 항수 39의 등비수열의 총화를 구해야 한다.

수식은 Sn=a(1-rn)/1-r. 대입해 해(解)를 구하면 1,099,511,627,774 분이다. 60억 세계 인구의 약 183배(엑셀로 계산한 것이니 정확할 것이다.) 1조 995억여 명의 육신과 정신이 만들어 놓은 나. 인류의 집대성 - 대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태어난 나다. 내가 또 다른 사람과 손을 잡을 때, 1조(兆) 단위의 인류와 또 다른 1조 단위의 인간대표의 만남이며 인류의 대향연이다. 어찌 배신과 증오, 미움이 싹틀 수 있으랴. 조 단위 또는 수천 억에 이르는 인류를 대표하는 개인 앞에 성스러운 경배만 있을진저.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의 기원은 우주의 대폭발과 별들의 생성과 소멸과정에서 생겨난 성운(星雲 : 별 먼지)이라고 한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 개의 탄소가 만들어지기 위하여 세 개의 헬륨이 필요하고, 헬륨 한 개는 소수 원자 네 개의 핵융합반응이 있어야 한다. 빅뱅 이후 제1세대 별들의 핵융합반응으로 탄소를 만들고 초신성(超新星)으로 폭발하여 가스 구름으로 흩어지면, 제2세대 별들이 탄생하여 핵융합반응으로 더 많은 탄소를 만들고 초신성으로 일생을 마친다. 이런 사이클이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탄소와 질소, 산소들이 증가하여 태양계가 형성된다.

지구와 태양의 나이 약 45억 년, 우주의 나이 약 120억 년이라면, 80억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별들의 생성과 폭발의 반복이 중원소들을 만들고 지구와 인간이 탄생한다.

∴ 인간의 고향은 별이며 내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신의 프로그램은 고도의 정밀성과 필연성이 아니곤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만들엊인 인간이다.

보르헤스는 우주의 빅뱅이 시작되던 최초 1초 간격의 어느 순간이 정지된 2~3㎤의 새알 속에 전 우주가 압축된 채로 들어있는 물체가 알렙이란 이름으로 지구도처에 존재한다고 한다. 그 새알 속에 태양과 달, 그늘진 산마루, 얼어붙은 시냇물, 9‧11테러와 보복 전쟁이 있고, 어머니와 내 이웃과 죽었던 동창생이 있으며, 소리 없이 떠난 첫키스의 여인이 있고….

고대인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를 믿었으며, 중세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神)의 도시를 믿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다양한 변화와 과거와 현재, 우연과 필연이 공존하는 보르헤스의 알렙을 믿는다. 고대와 중세는 인간의 정신과 내면을 응시한 반면, 현대는 다각도의 시각으로 인간 전체를 포용한다. 시대마다 변하는 것은 인식의 차이일 뿐,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자신일 것이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말하는 알렙도 인간의 알레고리로 읽어야 한다.

마주보는 거울 앞에 서서 무한히 증식하는 영상을 바라본다. 거기 누이가 있고, 형제가 있고 아버지… 수없이 떠오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난다. 그리고 거울 속에 떠도는 외로운 섬이 되기도 하고 행성의 폭발이 되기도 하며 밤하늘 별이 되었다가 알렙이 되기도 한다.

무수히 중첩된 그림자 속에 아직도 표출되지 못한 낯선 조상님에게 떠밀려 거울 밖으로 나오니 수십만 개의 이미지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일제히 합체된다.

합체된 압축파일, 그것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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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또는 도용한 문서들>

‘평범한 인생’ 챠페크, ‘우주와 인간’ 이영욱, ‘알렙’ 보스헤르

‘바벨의 도서관 읽기’양운덕, ‘예찬’ 미셀 뚜르니에

‘지식의 역사’ 챨스 반 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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