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야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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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야 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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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0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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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화장실 문짝이 고장 났다. 여닫을 때마다 삐꺽거리고 탁탁 부딪는 소리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사흘째다. 날이 갈수록 더 커진다. 저걸 어떻게 고치나. 이 시시한 걸 목수에게 보이자니 출장비에, 부품비 거금 들이고 싶지 않고, 내가 고치자니 잘못 건드려 더 큰 고장을 낼 것도 같고.

문짝을 깎을까. 닫는 부분이 하단부라 거꾸로 서서 깎자니 보통 난공사가 아닐 것 같고, 요즘 문짝은 합성수지로 본체의 사면을 껍질 같은 얇은 판자로 접착해 놓았으니 아예 접착 부분을 떼어버려.

생각다 못해 목수 일로 잔뼈가 굵은 친구를 찾아 물었다. 방법이 있겠느냐고.

방법 1. 접착부분을 떼어 낸다는 일은 요즘 접착기술이 좋아 좀처럼 떨어지지도 않고, 떼어내도 나머지 부분이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방법 2. 경첩 고정나사를 풀었다 다시 조이면 나사 구멍이 커져 아예 문짝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른다.

방법 3. 문짝을 손댈게 아니라 문틀을 깎아 보는 게 어떨까. 문짝과 접촉하는 부분을 끌이나 칼끝으로 깎아 보란다.

돌아와 끌을 찾는다. 100여 호가 실히 넘는 동네임에도 불과하고 대패 하나 구하지 못하는 판에 끌이 있을 턱이 없다. 쓸만한 연장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몇 년 전 지하철에서 만원에 10여 개를 한꺼번에 사온 카터 면도날 중에 넓적한 것이 눈에 띈다.

문틀을 깎는다. 사온 후 한 번도 써먹지 못한 카터날이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문을 여닫는다.

감쪽같다. 시끄럽던 마찰음이 사라졌다. 전화를 건다.

“야 이 자식아. 네 말대로 하니, 기가 막히다. 네 기술이 좋다.”

“이런 고연 놈. 형님보고 못하는 소리가 없어.” 친구 목소리 낭랑하다.

쉽고도 간단한 기술. 우리에게 총체적으로 존재하던 기술(우리 조상들은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손수 만들고 고쳐 썼다, 그리고 우리 또한 1970년대 어느 순간까지 조상님들과 똑같은 기술자들이었다)은 미분화 되어 전문가로 분업화 되었다. 라디오, TV, 자동차, 컴퓨터, 문명의 이기. 이 기계들 앞에 우리는 작동의 원리조차 알려고도 않고, 사소한 수리조차 기술자에게 맡겨버렸다. 각자 다양한 종류의 기술자라는 사실을 포기한 것은 물론, 거대하고 이상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이 오늘따라 왜 이리 절실할까.

나는 뭘까. 공직에서 나왔으니 공무원의 범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돈을 번다거나 노동을 통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도 못하니 한낱 식객 ― 비경제인으로 추락한다.

책 읽고, 글 쓰고 문단에 등록했으니 수필가라는 기술자 한 사람. 또는 하나의 부품. 여주군, 경기도, 대한민국, 또는 아시아, 세계란 구조 속에 아주 미약한 요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품 하나.

라디오의 작은 부속 하나 빠져나가도 발성을 중단하는데, 30년 넘게 일해온 직장이니 내가 떠나면 와장창 망가지던가, 영원히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나 퇴직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잘만 돌아가니 울화가 끓는다. 라디오 부품만도 못한,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처치 곤란한 사내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뉴턴의 중력 법칙은 뉴턴이 아니라도 누군가 발견했을 것이지만 내가 쓰는 수필은 나 아니면 아무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감칠맛 나는 일이다.

“야 이 자식아….” 나이 열 살 때 앞개울에서 고추 맞잡고 멱 감던 총체적 기술로 충만하던 내 어린 시절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 삼빡하게 터져 나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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