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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후가(無後家) 직권말소(職權抹消)
  • 중앙신문
  • 승인 2018.08.0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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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꽤 오래된 유행어다. ‘외아들을 둔 어머니는 골방에서 죽고, 형제를 둔 어머니는 양로원에서 죽고, 외딸을 둔 어머니는 딸네 애 보러갔다 비행기 안에서 죽고, 딸 많은 어머니는 이 집 저집 애 보러 다니다 버스 안에서 죽는다’는 이야기에는 부모의 역할은 하지만, 자식들의 효(孝)는 기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모질게 깔려있다.

효(孝)에 집착하지 않는 남아선호(男兒選好)사상도 흐지부지해졌는지, 대(代)를 잇는 중압감도 사라졌다. 게놈을 읽다보면 염색체를 통하여 자자손손 유전하니 사람들은 하나하나 개체로 소멸하겠지만,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집착하던 손(孫)세우기도 부질없는 짓이다.

호적은 한 가계(家系)의 역사로, 그 역사가 끝나면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2002년 4월 1일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 직권허가 기재, 동월 18일 무후가(無後家) 직권말소(職權抹消)’.

풀어쓰면 ‘2002년 4월 1일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원의 허가로 같은 달 18일 가문(家門)을 이어갈 사람이 없어 호적(戶籍)을 지운다’는 뜻이다.

호적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 출생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되면 혼인, 이혼, 인지, 입양 등 신분행위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으로, 족보(族譜)에서 연유된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가 징용, 세금, 부역, 독립군 색출을 위해 만든 악법이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와 귀추가 주목된다.

친구가 딸 자랑하는 꼴이 미워 ‘폐가처분(廢家處分)’이란 말을 했던 모양이다. 몇 년 후 “아들이 없으면 내 호적이 폐가처분 된다고 해 아들을 낳았노라”고 기염을 토하는 걸 보면 아직도 대(代)를 잇는 명분은 지대하다. 60이 넘도록 후사(後嗣)가 없어, 첩을 들여 종손의 맥을 잇는 분을 보았다. 몇 년 간 집안이 시끄러웠지만 대를 잇는 의지가 무섭다.

최근 산아제한(産兒制限)이 도를 넘어 유럽에서 유행하는 자녀기피(子女忌避)현상이 들어와 기르느니 애완동물이다. 강아지 털 손질하는 비용이 주인 파마 값을 웃돌고, 냉장고엔 개밥이 지천이며, 죽은 후, 재산상속까지 하니 개 팔자도 괜찮은 세상이다.

종족 보존은 생명체로서의 권리이며 의무이다. 민들레가 홀씨를 날려 보내고, 하루살이가 짧은 한나절 부산하게 살다 간 행위는 치열한 삶의 전쟁이다. 삼족(三族)을 멸(滅)하는 중벌은 종족의 뿌리까지 뽑겠다는 모진 형벌이다. 사육신 중 누군가 자기로 인해 멸문(滅門)의 화를 당하니 조상에 대한 불효를 어쩌면 좋으냐는 물음에 “의(義)가 아니면 이미 효(孝)가 아니다”라며 종족 보존의 의지를 단칼에 베어내는 그 아버지의 기상 또한 추상같다.

추석이나 설이면 어김없이 뿌리 확인―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난다.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세계 TV 시청률 최고를 기록한 걸 보면 가계(家繼) 찾기가 잃어버린 근원(根源)에 대한 향수이며 자각(自覺)인 모양이다.

산아제한이 못 마땅해, 케네디 가(家)의 많은 자녀와 손자들의 집단을 보고, 돈 많은 부자라 돼지처럼 낳아 사육이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둘만 낳아 길러도 3대에 이르면 10여 명을 훨씬 웃도니 번식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이 왕성한 번식력도 어느 틈에 사라져 호적의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폐가처분(廢家處分)되어 제적부(除籍簿)로 자리를 옮길 땐 자못 숙연해진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원시 인간에서 청동 투구와 말 달리던 광야와 포효하던 산화, 비극의 전쟁과 영욕의 나날들, IMF의 쓰디쓴 맛까지 보고 호적의 문을 닫는다.

로마 검투사의 마지막 거두는 숨이나 허물어지는 집채만 슬픈 것이 아니다. 한 가계의 일대기를 마감하는 호적부 앞에 마음 정제하고 무후가(無後家) 직권말소(職權抹消)를 쓰는 내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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