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아무 것도 아니면서 십만 명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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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아무 것도 아니면서 십만 명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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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1.1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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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대형 마트 진열장에 늙은 남자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누굴까. 낯설지 않다. 그러나 알 수 없다.
누굴까. 모른 체 지나쳐도 되지만 확인하고 싶은 건 뭘까. 누굴까. 곰곰 생각해 봐도 모를 일이다.
다음 창에 다시 나타나는 그림자. 멈춰 선다. 나다. 나의 뒷모습을 왜 몰랐을까. 내가 나를 모르다니.

카운터 아가씨가 안녕하시냐고 반색을 한다. 낯선 여자다. 여자 얼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버릇이라, 남의 여자 빤히 쳐다본다는 게 외설스럽고, 아내 아닌 여자를 애써 기억한다는 것이 도리가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낯모를 여인에게 인사를 받으면 내가 언제 이렇게 컸나하는 마음에 으쓱해지기도 하고, 혹 이런 여자 앞에 실수라도 저지르면 훌륭한 분에게 개잡놈으로 추락할까 겁난다. 인격도야가 덜 돼, 추락 가능성이 충분하고, 추락하면 북구 불능이라, 이제부터라도 여자 얼굴 야무지게 기억하리라. 이처럼 시장에서 마주친 여자도 아는 나를, 내가 나를 모르다니.

탤런트 ○○으로 오해받는다. 보자마자 ○○과 꼭 같아요라는 말 들을 때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다 못해, 인터넷에 들어가 사진속의 이미지를 몽땅 꺼내 방안 가득 채워 보지만 영 아니올시다다.

나를 아는 사람이 누굴까. 아내. 30여 년 같이 살았으니 잘 알 거다. 아담한 키에, 정상에서 약간 웃도는 체중, 퇴직 연금으로 근근이 사는 남자. 성질머리 더러워 스트레스 과부하로 아내에게 협심증까지 만들어준 남자…. 글쎄.

건강검진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시경과 초음파로 위장에서 췌장, 심장, 간, 콩팥까지 샅샅이 훑어 본 의사, 그러나 내 두뇌의 무게, 염통의 크기, 맥박의 주기, 실핏줄의 표면적, 손톱의 두께조차 모른다.
어머니. 아니다. 어렸을 적 목욕시키던 엉덩이와 뽀얀 뺨, 우등상장 잘도 타오던 아들로 각인된 채, 나이 60이 되어 허물어져가는 육신은 생각도 못하셨을 테니 더욱 아니다.

내 글 잘 읽어 주는 수필가 ○○. 글 속의 장점만 읽고, 단점은 건너뛰며, 독서의 양과 질, 폭과 깊이까지는 간파하지 못했으니 그도 아니다.
이웃 친구들. 우유부단한 인간, 이기심 덩어리, 치사한 놈, 제 자랑만 늘어놓는 얼간이, 친구 생각은 손톱만치도 않는…. 애틋한 정 한 조각 남아있다면 다행일까.

애인, 아니면 여자 친구, 또는 은사님, 이웃 집 아줌마, 눈 찡긋 손 흔들어 보이는 여자… 아니다. 진열장에 스친 뒷모습만큼도 모른다.
그럼 나는 뭔가. 장롱 속 뒤져 팬티에서 런닝 셔츠, T셔츠, 넥타이, 콤비, 싱글, 오버코트, 반바지, 잠옷, 와이셔츠, 면바지 번갈아 벗고 입어, 디지털 카메라 앞에 셀프 포토 100여 장을 찍어 아무리 찾아도 찾는 나는 없다.

찾아지지 않는 나는 책상 위에 볼펜 한 자루, 인간에게 왜 어떻게 사용되고, 존재 이유조차 모르는 사물들 ― 커피 잔, 의자, 컴퓨터, 사진 한 장 들어 있는 액자, 병나발 불다 남긴 소주병, 막내아들이 읽다 버린 만화책과 다를 게 뭔가.

죽어 울어줄 아들 셋과 아내, 선후배 몇 명,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세월 지나 금방 잊혀질 이름 석자. 태워한 줌 재가 되거나 부식할 육신. 연기처럼 사라질 286 컴퓨터 용량만도 못한 지식 정보로서의 나. 내가 태어나서 죽는 날 까지 스친 사람들이 십만 명쯤 될까. 십만 명의 생각 속에 작은 잔상의 파편들. 그게 나다. 그렇게 만들어진 파편들을 모아 이리저리 짜깁기를 해도 내가 아니며 나 또한 나를 모르니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혹시 도플갱어(Doppleganger).

아니다. 아침이면 새롭게 피어나는 이슬, 반짝이는 햇살, 꿈틀거리는 물고기의 비늘…. 모든 사물은 과거에 오늘을 더한 확장된 새로운 사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나는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난다. 셰익스피어를 모르던 나와 햄릿을 읽은 내가 다르듯 오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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