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흠씬 두들겨 패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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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흠씬 두들겨 패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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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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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맞으며 컸다. 밥 먹다 밥풀 흘리면 맞았고, 생선이나 고기의 살점을 남겨도 맞았고, 수박의 붉은 과육을 남겨도 맞았고, 사과 껍질을 두껍게 벗겨도 두들겨 맞았다. 어른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도 맞았고, 어르신 말씀 귀담아 듣지 않아도 따귀를 맞았다. 그렇게 두들겨 맞으며 컸다. 얼마나 맞았으면 내 어른이 되면 아들은 죽어도 안 때릴 거라고 맹세하며 컸다.

신경림 시인이던가. 우리 나라 어린이들이 잘 먹고 잘 입어 호의호식할 날을 염원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그 또한 왜정 시대를 거치며 자란 한이 얼마나 컸을까. 일제 강점 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어느 일본인이 엄동설한에도 가랑이 터진 바지를 입고 벌건 아랫도리를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어린이를 보고 조선 사람이 이렇도록 강한 민족이던가, 하며 감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국에 전쟁이 나면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귀국해 조국을 위해 싸우지만 아랍 학생들은 전쟁을 피해 조국을 외면하는 비열한 종족이라고 초등학교 교육을 받으며 우리를 이스라엘 민족과 동시해가며 뿌듯해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억겁의 세월이 흐른 것도, 천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백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겨우 일, 이십 년의 차이로 세상이 뒤집힌다. 디지털 문화가 맹위를 떨치고 여권(女權)이 신장하더니 자녀 교육까지 아비의 몫에서 어미의 몫으로 바뀌어, 사내자식들이 마마보이가 되어 눈깔사탕이나 핥고 있다. 엊그제 제대한 막내아들이 의경으로 근무하던 부대에서는 제법 고참이 된 덜 떨어진 병사 하나가 자질구레한 심부름이나 기합 또는 욕설 몇 마디까지 자기 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해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부대 안팎을 벌집 쑤시듯 휩쓸어 놓고 간다고 하니, 그 군대 기강 가히 짐작 할 만 하다.

얼마 전 일석점호에서 화장실 청소가 엉망이라 변기 속 똥을 찍어 맛보게 했다는 기사가 매스컴을 뒤흔든 적이 있다. 그리고 나라 전체가 흥분했다. 그러나 솔직한 말은 은밀하게 도는 법이라, 똥 사건이 끝나갈 즈음, “가만 있어봐. 군대에서 그런 일은 언제나 있었던 일이잖아.” 한 마디 떨어지기 무섭게 “그거야 다반사죠. 군기가 빠졌다는 말씀이지요. 똥 찍어 먹게 한 장교가 옳아요. 실내 화장실 변기에 똥 덩어리를 방치한 채 점호를 받겠다는 병졸이 군인인가요.”

‘3대 가족 병역이행 명문가 표창’이란 제하(題下)의 신문기사가 나돈다. 끗발 없는 가정이야 누구나 군대갔다 오는 게 당연지사인데 웬 놈의 명문가. 뒤통수 긁으며 따져보니 그것도 많아 보이지 않으니 나 또한 더럽게 끗발 없는 놈이다.

무슨 놈의 나라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놈 군대갈까 겁나 미국에 가서 자식을 낳고 국적을 포기할까. 과거 유학으로 전쟁을 피한 아랍인만도 못한 게 우리 한민족 아니냐. 엄동설한에 벌건 아랫도리를 내어 놓고 뛰어놀던 강인한 조국의 어린이들이 식당에서 공공장소에서 몰상식하고 버르장머리 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들뛰어대니 신경림 시인은 아직도 자기 말을 고집할까.

엊그제 연천 GP 근무자 총기 난동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TV, 신문, 라디오에서 별의 별 수식어 몽땅 동원해 떠들어대지만 동네 아저씨의 지나가는 한 말씀을 따르지 못한다. “군기가 빠져서 그 꼴이야. 매일 수 십 대씩 패야 제대로 정신이 들어.”

요즘 같아선 눈부신 젊은 세대보다 신나게 얻어터지며 큰 내가 자랑스럽다. 30여 년 전이었던가. 폭군으로 군림하는 이웃 아저씨에게 정색을 하고, “아저씨는 우리 아버지와 똑같군요. 왜 가족을 때립니까. 나는 아버지를 싫어해요. 댁의 아드님도 아저씨를 증오할거예요”라고 쏘아 붙이니, 아저씨 왈 “이 사람아 자네가 이만한 것도 아버지가 때려준 덕이야.”

아버지 세대의 주먹구구식 파쇼 교육이 담금질 같은 건 아닐까. 밟아도 밟아도 다시 사는 잡초. 죽어도 죽어도 꺾일 줄 모르는 불굴의 사나이.

전국토가 상중인 양 GP사망자 분향소로 집중되건만 외면하고 아버지 산소 앞에 놋 술잔 한 잔 올린다.

아버지 흠씬 두들겨 패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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