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 에세이]통장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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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에세이]통장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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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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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이른 봄 부산항에서 호주산 벌을 받아 밀원(蜜源)을 따라 남쪽 끝에서부터 벌통을 이동한다. 유채꽃, 아카시아꽃, 싸리꽃, 밤꽃, 메밀꽃…. 꽃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1년 동안 우리 나라를 종단해 북방 한계선인 휴전선에서 벌을 몽땅 날려 보낸다. 남은 건 통장 하나.

농사를 짓는다.

못자리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논갈이 로타리 써레질은 이장(里長)에게 맡겼다.

전화가 왔다. 논 가에 뿌릴 비료를 내어 놓으란다. 트랙터로 뿌려 주겠단다. 한 달이 지나 못자리 쪽에서 전화가 왔다. 모 심을 날을 정해 달란다. 모 심을 날을 정하고 2, 3일 전 로타리를 치고 써레질을 한 후 제초제를 뿌렸다. 힘들지만 견딜 만하다.

아침 일찍 이앙기를 앞세우고 모판이 왔다. 아내와 모판을 내리고 이앙전 입제 농약을 뿌렸다. 도열병은 심하지 않으니 살충제만 뿌리라 한다. 독하게 뿌렸다. 본답에 뿌릴 양을 모두 모판에 뿌리니 켜로 쌓였다.

모심은 꼴이 시원찮다. 남의 논은 줄이 척척 맞건만 내 논은 삐뚤 빼뚤이다. 빨리 심고 다른 논 심을 요양으로 새벽에 왔고, 후딱 심고 가려는데 여의치 않은 눈치다. 일단 모는 제대로 심어 놓고 볼일이다. 내년에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단위 면적당 총총히 꽂아 놓고 쓰러트리지 않고 벼 알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농사의 목적이다.

모내기 후 물관리가 초미의 관심사다. 어린 모라 깊으면 곯아 죽고, 낮으면 타 죽어 써레질을 얼마나 평탄하게 했느냐, 모의 키가 얼마나 크냐가 1년 농사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처럼 모낸 후 물 관리도 만만찮다.

물을 댄다. 양수장에서 남한강 물을 끌어 올린 물이다. 콸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남한강 배 띄어 놓고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을 생각한다. 정몽주가 다녀간 언덕, 목은 이색이 독주를 마시던 강나루, 나옹대사 입적하던 강기슭, 대형 버스의 추락, 나룻배 전복으로 숨진 수천의 넋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빵빵하게 물을 대고 보니, 논물에 하늘 그림자 떴다. 반사된 하늘, 거기 수천의 넋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는 농사꾼만 짓는 게 아니다. 남한강물과 수천의 넋들이 힘을 합쳐 벼를 키우고 있었다.

모낸 지 14일 째 가지 거름을 준다. 미스트기를 이용 할 수도 있겠지만 기계 무게에 비료 무게 합치면 만만한 게 아니다. 손으로 뿌리니 문제가 생겼다. 한 움큼을 몇 번에 나누어 뿌리느냐인데 너무 여러 번에 날린 모양이다. 한 바퀴 돌고 나니 너무 적게 뿌렸다. 다시 더 뿌렸지만 시원찮다. 4 필지 중 한 필지, 벼 크기가 들쭉날쭉이다. 그렇다고 다시 더 뿌릴 일도 아니고 이삭 거름을 기약하지만 천만의 말씀. 이삭 거름 잘못 주는 날이면 몽땅 쓰러뜨려 폐농을 하는 수도 있다. 이삭 거름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양은 얼마나 할 건가. 언제나 지도소 권장량은 적게만 느껴지고 이웃의 말은 검증된 바 없어 신빙성이 없다. 비료를 줄 수 있는 시기는 출수전(出穗前) 20~23일로 2, 3일이다. 이 기간이 지나면 유수형성기를 놓쳐 비료 효과도 떨어지고 도복의 위험만 가중한다.

이삭거름 줄 때만 되면 고민을 해야 한다. 농사꾼 최대의 고민이다. 1년 농사가 이 몇 시간에 결정이 나니까. 줄까 말까 하다, 주었지만 아무래도 덜 준 것만 같아 아쉽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도복피해를 입는 것보다 낫지 싶어 욕망을 접는다.

농사꾼은 일이 있건 없건 새벽 논두렁에 서성여야한다. 그게 뿌듯한 긍지이며 보람이다. 뿌듯하게 솟아오르는 벼 잎을 본다. 벼 잎 끝, 첨단(尖端)에 솟아 오른 이슬, 반짝이는 아침 햇빛, 수천 수만 수십만. 헤아릴 수 없는 이슬은 밤하늘 은하수다.

농사는 농사꾼만 짓는게 아니다. 밤하늘 은하수와 별빛과 바람과 은밀히 다녀간 고라니의 발자국과 찬란한 햇빛이 모여서 짓는 것이 농사란 거다.

벼를 벤다. 콤바인 운전수가 여자다. 뽀얗게 화장하고, 귀걸이까지 했다. 놀라는 사람 없는 걸 보면 나만 처음 보는 모양이다. 벼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식량으로 쓸 만큼만 정미소로 보내고 모두 물벼로 수매했다. 옆집에서 묻는다. 농사를 지은 걸로 아는데 볏 가마가 왜 보이지 않느냐. 볏짚은 논바닥에 썰어 놓았고, 식량은 정미소에 맡겼으며 나머지는 수매를 했으니 통장 속 돈뿐이다. 돈이 너무 적다. 목이 멘다.

1년 농사에 동참했던 포은, 이색, 나옹 대형버스와 나룻배의 수천의 넋들, 남한강물과 바람과, 별과, 고라니, 햇빛…. 빈 논바닥에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되어 날아가고 있다.

남은 건 통장 하나.

기관장으로 정년퇴직한 친구가 지갑을 떨어뜨리고 갔다. 왕년에 떵떵거리던 친구라 호기심이 발동해 지갑을 뒤졌다. 주민등록증과 당사자 죽으면 써먹지도 못할 연금 통장뿐. 우리 사라지는 날.

남은 건 통장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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