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린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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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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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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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한국문인협회여주지부 회장을 맡았다.

회장이 되니 관내 크고 작은 행사에 초대된다. 개인입장에선 초청장이 와도 사양하겠지만, 회장이니 필히 참석해야 한다(회장이 아니면 초청장이 오지도 않겠지만). 강행 규정이며 의무이다.

그런데 의전(儀典)에 문제가 생겼다. 나는 여주군 전체 문인을 대표한다. 면 단위 또는 이익 집단의 대표가 아니다. 그런데 하객 소개 순서에 군수, 의원, 면장, 전임 군청과장, 그리고, 그리고, 꼴찌에서 두 번째. 그것도 “여주분인협회지부장”이라고. 분인협회가 뭔가. 부인협회를 잘못 발음한 것일까. 맞는 거라곤 내 이름 석자뿐. 호명되는 사람마다 일어서서 넙죽 절하고 큰 박수를 받는다. 일어서지도 않았다.

4, 50년 전, 큰 행사에 초대되었다가 자기 서열이 격하된 것을 알고 분연히 자리 박차고 나간 박정희 소장을 생각한다. 그 땐 그를 쫌팽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심사를 헤아린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자리가 중요할까. 순위야 실수로 잘못 정할 수도 있고, 순위가 인품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닌데, 자리다툼 서열 다툼하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보였다. 행사 때마다 따지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따지고, 주최 측은 다음 행사에 바로 잡겠다 해놓곤 또 다시 그 순위로 행사를 치르고, 따지면 또 다음에 바로 잡겠다 다짐한다. 그러나 다음에도 마찬가지니 따지는 놈만 천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의전이 행사의 주(主)가 될 수 없으며 주가 아니면 실무자들에게 똑 부러지게 챙겨지지 않기 때문에 악순환만 되풀이된다. 요는 서열은 따지는 당사자에겐 중요하지만 행사를 치르는 자나 행사에 참석한 갑남을녀에겐 관심 밖이라 혼자 날뛰는 꼴이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벌레 같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얽히는 거미줄.

거미줄에 걸린 게 나다. 여주문인협회 회원이 이 꼴보면 뭐라 할까. 개인이 아니라 문인협회 위상인데. 이 행사 준비한 사람과 한바탕 따져 보아야겠는데, 따질 사람이 후배이며 나 또한 ‘천박하다’고 생각했던 걸 따져 무엇 하랴. 끽소리 못하고 나왔다(다음에 또 이러면 조곤조곤 따져 꼭 이기리라).

시청(市廳) 행사에 주둔군 사단장과 연대장이 동시에 초대되었다. 격려사에 사단장보다 연대장 순위가 빨랐다. 행사 끝난 뒤 사단장은 수행 부관을 코피가 터지도록 패 버렸다. 겉은 노블레스들의 고상한 향연이지만 이면(裏面)은 수행 부관이나 비서들의 자기 상관자리 찾기 피 터지는 싸움판이다.

자리 순서는 왜 만들어 이전투구를 하는지. 인간이 살아가려면 삶의 현장인 시장(市場)이란 게 있고, 질서가 있어야 하며, 경찰, 군인, 국가, 크고 작은 사회 단체란 게 생겨나, 좋든 싫든 계급사회를 구성해 서열이 생기고 어느 틈에 인간 구실의 척도가 되니, 제대로 된 인간되자고 아우성이다.

문인협회 회장이 뭔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 문인들 대표가 아닌가. 그러나 회장이기 전에 문필가로서 이슬 속에 갇힌 영혼이기를 기대하지만 관내 기관장서열을 모른 척할 일도 아니다. 문인협회 여주지부 회장이라는 자리 순위에 대하여 고수하여야 할 필요충분조건인 여주문인협회의 위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회단체 행사에 참석했다. 소개 순서가 바뀌었다. 자기 임원 소개가 먼저고 나중이 군수, 군의장, 의원 기타 등등이다. 기관장 서열의 틀이 깨어지고 자기 집단 우선 순위로 바뀌었다. 여우와 두루미의 잔치판 같아 역겨웠는데 자세히 보니 대우받지 못한 자의 항변으로 보인다.

자리 다툼, 이 꼴 저 꼴 보기 싫으면 몽땅 내어놓고 두문불출 책 읽고, 글 쓰면 된다. 문인은 글로 말하고, 글로 대적할 일이다. 독야청청 모른 척하자니 “회장이란 작자가 뭐하는 놈이야. 자리 하나 못 지키고”하는 것만 같아 좌불안석이다.

명예가 뭔지, 자리, 자리 때문에 고매해야 할 내 영혼, 거미줄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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