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집
상태바
여름집
  • 중앙신문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8.08.30 11: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지순 (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지나가면서 여름에만 산다는 작은 집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을 보았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겨울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겨울집에서 살고 여름에는 시골에 있는 여름집에서 지낸다고 한다.

우리도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5월 초부터 추위가 오기 전 9월 말까지 여름집에서 지내고 있다. 허울 좋게 여름집이라 이름 붙인 샌드위치 판넬로 지은 농막을 그런대로 여름을 지내기에는 시원해서 좋다. 침실 하나에 거실, 꿀벌 작업을 하는 작업실과 아이들이 버리기 아깝다고 갖다 놓은 물건을 쌓아 놓은 창고가 있다. 농사를 지으니 농기구를 넣어두는 광은 필수다. 난로에 피울 장작을 재워 놓는 헛간도 있다. 아파트에서 우물쭈물하다 농장에 도착하면 일할 시간이 모자란다. 그래서 아침저녁 시원할 때 일 하기 위해 여름집에서 산다.

집 옆 작은 골짜기의 산들바람이 제법 더위를 식혀 준다. 사방이 짙은 녹음으로 싸여있어 눈이 시원한데다 동네보다 온도가 2, 3도가 낮고 바람이 늘 불어오니 골짜기 옆에 앉아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소리는, 작고 울퉁불퉁한 돌 위로 떨어지는 물소리라고 한다. 더위도 피하고 마음도 가라앉히는 물소리를 들으면 나뭇잎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예쁜 곤충이 날아다니는 것을 구경하며, 온갖 아름다운 새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진분홍과 연분홍, 하얀색으로 흐드러지게 핀 작약이 눈을 현란하게 한다. 옆에는 금낭화가 초롱불을 조롱조롱 달고 있으며, 자주달개비와 붓꽃도 짙은 보라색을 뽐내고 있다. 못에는 연꽃이 수줍은 듯 봉오리를 내밀고…. 식탁을 풍요롭게 해 주는 갖가지 채소와 앵두, 매실, 양보리수, 자두도 있으며, 가을이면 감과 대추가 있으니 이만하면 살만한 여름집이 아닌가.

삼면을 싸고 있는 산은 깊은 숲을 이루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앞이 탁 트인 경치는 어느 무릉도원 부럽지 않다.

여름집에는 넓은 여백을 남겨 놓고 시원하게 살고자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살림에 필요한 물건들이 차츰 공간을 차지해 가고 있다.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을 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다.

여름집은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개 두 마리와 밥 얻어먹으러 오는 길고양이 서너 마리, 비단잉어 수십 마리, 붕어, 미꾸라지, 거기에 벌이 수십 통이니 벌식구만 해도 백여만 마리다.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진을 치고 사는 백로와 왜가리, 해오라기, 물총새도 있다.

시간이 남아 돌 때 못가에 앉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팔뚝만한 비단잉어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다. 씨 뿌려 놓은 각종 작물들도 하루하루 자라고 열매달고 하는 모습에서 생명이 깃들고 있음을 감지한다.

여름집은 조용하다. 도로가 멀리 있어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동네에서 떨어져 있으니 이웃이 없어 삶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없다. 벌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으니 개가 짖을 일도 별로 없다. 피어나는 꽃들은 소리 없이 꽃잎을 여니 침묵이 흐르는 속에서 가만히 앉아 시골에서만 들리는 소리와 냄새를 가슴 속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여름집은 지혜롭다. 문만 나서면 심어 놓은 갖가지 작물들이 손짓을 한다. 된장찌개 안쳐놓고 고추 몇 개 따다 썰어 넣고, 밥 안쳐 놓고 가지 따다 쪄서 무치고, 밥 차려 놓고 깻잎 따다 쌈 싸 먹는 생활이 즐겁다. 장마 후 무섭게 자라는 풀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작은 농사라도 일은 해야 되니 어쩌랴.

축축하게 습기 찬 날 난로에 장작을 지피면서 집안의 습기를 거두고, 멋대로 춤을 추며 타고 있는 불꽃을 보면서 갖가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벌을 돌보면서 힘들기는 하지만 너무도 지혜롭고 치열하게 사는 벌에게 감탄을 하면서 배우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어 시골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농촌생활에서 얻어지는 편안함을 오랜 세월 뜸을 들여야 농익어 익숙해지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문화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해충과 풀에 시달리고 일하느라 고달프기는 하지만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마음과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비록 초라한 농막과 볼품없는 농장이지만,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조용하고 시원하며 갖가지 즐거움을 주는 여름집이 있어 내 삶이 좀 더 풍요롭다는 생각을 한다.

구월이면 여름집은 적막해진다. 죽은 듯 숨도 멈춘 듯하다. 적막한 여름집을 뒤로하고 겨울집으로 떠난다. 하지만 겨울이면 여름집이, 여름이면 겨울집으로 돌아갔을 때 작렬하는 뜨거움과 찬란했던 여름날이 그리워지리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단독] 3년차 의정부시청 여성 공무원 숨진 채 발견
  • 박정 후보 유세장에 배우 유동근氏 지원...‘몰빵’으로 꼭 3선에 당선시켜 달라 ‘간청’
  • 감사원 감사 유보, 3년 만에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산단 공급
  • [오늘 날씨] 경기·인천(20일, 토)...낮부터 밤 사이 ‘비’
  • 김포시청 공직자 또 숨져
  • [오늘 날씨] 경기·인천(24일, 수)...돌풍·천둥·번개 동반 비, 최대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