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땅의 눈물
상태바
[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땅의 눈물
  • 중앙신문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8.09.17 11: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인간들이 너무 땅을 못살게 구니 땅이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살아오면서 예상치 못하게 닥치는 불가항력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당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길이 모두 망가지고, 밭의 흙이 떠내려가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 바라보는 마음이 허탈하기만 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무섭게 쏟아지는 물은 처음 보았다.

남편은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퍼붓는 비를 바라보며 걱정은 접어 두고, 망가지면 할 일이 생기니 좋다고 하면서 웃고 있다. 마음속은 시커먼 잿덩이가 되어 가고 있을 텐데.

지난여름 장마에 전국에서 제일 큰 피해를 입은 여주 이천이 ‘국가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다. 그중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뉴스 첫머리를 장식할 만큼 비 피해를 많이 입었다. 가을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아직 복구 되지 않은 길이며, 논밭이 널려 있다.

방안까지 물이 들어 온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천장까지 물이 차오른 집도 있다. 길이 떠내려가고, 농경지가 쓸려 나가고, 산에서 쏟아지는 토사가 논밭을 덮어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친 집이 부지기수이고, 축사에 물이 들어 소의 허리까지 잠겼다. 주변에 살던 사람들 몇 명이 생명을 잃기도 했다.

이웃의 양봉농가는 벌통이 수십 개 떠내려가고, 어떤 집은 양봉장이 물에 잠겨 시름에 잠겨 있다. 다행히 우리는 사람 다치지 않고, 집과 양봉장은 피해를 입지 않아, 면에서 피해상황을 둘러보러 왔지만 보상신청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동네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이 이런 물난리는 처음이라고 한다.

동네 뒷산을 깎아내려 택지를 만들고 있던 사람은 쏟아지는 물로 산 아래 있던 비닐하우스와 겨울에 소 먹이려고 만들어 놓은 엔시레이지가 모두 떠내려가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보상을 해 주었다. 나무가 다 베어지고 땅을 파헤쳐 놓으니 물을 품고 있어야 할 역할이 무너져 피해를 입었다고 동네 사람들의 불평이 크다.

밭 양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에 덮여있던 흙이 다 떠내려가고 돌만 남아 전보다 폭이 두 배로 늘어났다. 골짜기가 넓어지니 보기에 시원해져서 비가 와서 좋아진 것도 있다고 웃었다. 발을 담그고 놀만한 웅덩이도 새로 생기도 작은 폭포도 생겼다. 아이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기막힌 각본이다. 한 쪽은 가슴 아픈 일이 생기고 다른 쪽은 좋은 일도 생기니 공평한 조화다.

연못 무너진 것과 밭둑 무너진 것은 사람을 불러 대강 손질을 해 놓았지만 집으로 올라가는 두 길은 사람의 손으로 복구하기에는 불가능해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지금은 농경지와 동네로 들어오는 길은 손보는 것이 우선이라, 포클레인이 모두 바빠서 그 일이 얼추 끝나면 도와주겠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집 주변을 둘러보면 한숨만 나온다. 가지, 오이, 토마토, 호박 등 여러 작물이 강한 비로 짓무르고 터지고 떨어져서 먹을 수가 없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화단을 휩쓸고 가서 화초들이 뒤엉켜 키가 작은 것은 다 사라져 버렸고, 키 큰 화초는 장대비에 다 쓰러져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지주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차라리 다 없애버리고 깨끗이 정리를 하고 싶지만 혹시 뿌리라도 남아서 내년 봄에 다시 싹을 틔울지 모르니 마음대로 손을 댈 수도 없다.

그 와중에 고라니까지 내려와 속을 썩이고 있다. 50여 일이나 지속된 장마로 자란 풀이 억세져서인지 고라니는 낮에도 밭에 와서 심어 놓은 작물을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삼에 있는 풀보다 사람이 먹으려고 심어 놓은 풀이 더 맛이 있나보다. 무서운 진돗개가 두 마리나 있어도 묶여 있는 것을 알고 겁도 내지 않는다. 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도 머리가 아픈데, 고라니까지 거든다. 그것도 자연의 한 몫이니 어쩌랴.

자연이 망쳐 놓았어도, 다시 복구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힘은 자연과의 싸움에서 우위에 있는 것일까.

한숨 돌리고, 천천히 힘닿는 대로 조금씩 망가진 땅을 회복시키면서, 다시는 땅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자연 앞에 겸허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단독] 여주에 여섯 번째 ‘스타벅스’ 매장 문 연다...이르면 4월 DT점 오픈
  • 대학교 연못서 여성 시신 발견…국과수 사인 감정 의뢰
  •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㊾ ‘송도의 금강’으로 불린 청량산
  • 고양 화정동 음식점서 불, 18분 만에 진화
  • [영상] 고양 일산서구 아파트서 불, 50대 여성 부상
  • [오늘의 날씨] 경기·인천(25일, 월)...흐리다가 오후부터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