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오늘도 나는 술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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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의 살맛나는 세상]오늘도 나는 술을 담근다
  • 중앙신문
  • 승인 2018.10.2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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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순 (수필가, 칼럼위원)

집 뒤 숲 속 커다란 나무들 틈에 수십 년 된 돌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다른 과일은 흉년이라고 야단인데 금년에도 돌배는 많은 열매를 맺었다. 멋대로 놓아두어 사람 손을 타지 않으니 매달고 싶은 만큼 열매도 잘 열리는 것 같다. 해마다 돌배가 주렁주렁 달리지만 별 관심 없이 저절로 떨어져 나무의 거름이 되도록 버려두었었다.

금년에는 이웃집 사람이 돌배 술이 기관지에 특효인데 돌배를 구할 수 가 없다고 하기에 모두 따가라고 했다. 그는 돌배를 따서 우리에게 수십 개를 주고 갔다. 기침에 좋다니 술을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유리병에 돌배를 차곡차곡 채우고 35도 소주를 부었다.

아침에 담근 술이 저녁때가 되니 연한 갈색이 우러나면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자연에서 온 색은 임의로 만든 어떤 색깔보다 높은 품격을 지녔다.

오랜 세월 가지각색 과일 술을 담가 놓고 즐겼는데, 이제 석양에 서 있으니 술도 먹지 않아 철이 되어도 술 담그는 일을 잊어버렸다. 매실, 더덕, 인삼, 복분자, 말벌 술까지 담그기만 하고 먹지 않아 더 이상 담그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이제 술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슬슬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살아 계셨으면 100살도 넘었을 친정아버지가 모아 놓았던 조선 말기에 나온 돈과 일제강점기 때와 해방된 후, 육이오 때 발행된 돈이 꽤 많았다. 거기에 보탠 올림픽 기념주화, 외국에 다니면서 쓰다 남은 돈 등 제법 많은 양을 모두 아들에게 주었다.

젊어서 각국으로 출장을 다닌 남편이 모은 우표도 모두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 3년여를 살면서 수집한 나무화석과 조가비, 신기하게 생긴 조각품들, 외국에 출장을 가거나 여행가서 기념으로 사온 모든 물건들을 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니 마음이 좀 홀가분해진 것 같다.

평생 함께해 온 물건들을 떠나보내며 내 몸도 떠날 날이 멀지않았다는 생각에 서글펐다. 그래도 아직 너무도 많은 물건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충분하다. 그런데 오늘 또 돌배 술을 담그고 있다. 하지 말자 하면서도 자꾸만 사고 만들고 보태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가.

미국 메사츠세스주의 콩코드 마을, 150년 전에 인적 없는 ‘월든’ 호숫가에서 살던 소로우는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은 22가지면 된다고 했다. 그가 살던 방 한 칸으로 되어 있는 오두막집에는 요리를 만들던 난로와 몇 개의 그릇, 글을 쓰던 책상, 침대 외에는 별 물건이 없었다.

뒤뜰 작은 창고 안에는 간단한 농기구와 겨울에 먹을 식량을 저장하는 조그만 창고가 있었다. 소로우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살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별 불편이 없는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더 가지려고 기를 쓴다.

늘 버려야겠다고 하면서 버릴 물건을 고른다. 골라 놓은 물건은 이리저리 들춰보면서 고민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다시 집어넣으면서 어떻게 물건을 줄일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두 하찮은 물건일 텐데, 다시 쓸 일이 생기지 않을 줄 알면서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 거두어들인다. 욕심으로 가득 찬 속물근성에서 언제쯤이나 벗어날까.

갖가지 재료로 담가 놓은 술을, 술 좋아하는 친지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야겠다고 벼르면서 오늘도 또 돌배 술을 한 단지 담가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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