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㉗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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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㉗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7.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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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금곡동은 현재 인구수가 줄어들면서 인근의 창영동과 합쳐 금창동(행정동)으로 불리고 있지만 구한말까지 ‘샛골’이라 불렸던 동네다. 이런 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널려있으며 인천만 해도 대략 네 곳이 있다. 그 해석은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쇠(鐵)또는 금이 나왔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경우와 두 곳의 ‘사이(새) 마을(골)’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일설에는 이곳에 금잔디가 많아 금곡리로 불렸었고, 일제 때 유명한 성냥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냥의 원료인 누런 유황을 금에 빗대 금곡리로 불렸다는 해석도 있으나 그다지 타당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한 때 이곳에 인천을 대표하는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져 불릴 만큼 유명한 성냥공장이 있어 '인천'하면 '성냥공장', '성냥공장' 하면 '인천'을 연상시킬 만큼 유명했다. 필자가 1973년도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을 때 내무반장이 성냥공장 노래를 시켜 가사를 모르면 기압을 줄 정도니 이해가 갈만 할 것이다.

여기서 노래의 가사 몇 소절만 소개하면,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 만드는 아가씨~하루에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치마 밑에 불이 붙어~~” 이하는 가사에 외설성이 있어 생략하기로 함.

이렇듯 성냥 제조업이 인천공업의 대명사로 통했기 때문에 전라도 내무반장도, 경상도 내무반장도 인천 출신 신병들이 군에 입소만 하면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를 시키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냥공장이 세워진 곳이 어딘가에 대해선 기록마다 약간씩 엇갈린다. 그러나 향토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인천이 확실하다고 한다. 대체로 인천에는 개항 후 3년이 지난 1886년부터 성냥공장이 세워져 처음에 생산된 제품의 일부는 중국에 수출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저가의 일본제 성냥이 범람하면서 우리나라 중·남부 지역에서만 주로 소비됐다.

60년대 성냥공장 아가씨들. (사진제공=동구청)
60년대 성냥공장 아가씨들. (사진제공=동구청)

1917년 인천부 금곡리(현재의 금곡동 33번지 일대) 6천여㎡에 조선인촌(성냥) 주식회사가 들어서 연간 7만여 상자의 성냥을 생산했다. 이는 당시 국내 성냥 소비량의 20%에 이르는 것이며 ‘우록표’나 ‘쌍원표’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 직공만 해도 500여 명이나 돼 지방의 학생들이 공장 수학여행을 올 정도였다니 그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또한 공장 주변의 주민들도 종이에 밀가루 풀을 먹인 성냥갑을 만들어 납품하면서 동네 전체가 성냥촌이 됐으니, 그만큼 이 사업이 인천 공업의 대명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금곡동 일대 공터나 도로변은 햇볕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성냥개비와 성냥갑으로 가득해서 동네 전체가 성냥공장을 방불케 했다.

인천에서 유독 성냥제조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 사회적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인천에는 항구도시의 특성상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다. 이와 함께, 압록강 일대 오지에서 벌목한 나무들이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을 통해 반입되는 등 성냥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수월했다.

그러나 광복 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지포 라이터’에 이어 가스라이터의 등장으로 점차 성냥의 가치는 떨어졌고, 이 공장도 60년대 들어 문을 닫게 됐다. 성냥공장과 함께 금곡동에는 인천 유도의 전설인 김수복 옹의 도장 ‘대한 상덕관’이 헌책방 골목 입구에 자리 잡고 유명세를 떨쳤다.

60~70년대 대한성냥. (사진제공= 동구청)
60~70년대 대한성냥. (사진제공= 동구청)

수원 출신인 김옹은 17세 때 일본에 건너가 유도와 접골법을 배워 젊은 시절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각종 대회를 휩쓸고 다녔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유도 시합에서 몸무게에 따른 체급 구분이 없었다고 하는데 김옹은 큰 덩치의 일본인 유도 고수들을 모두 물리치며 명성을 쌓았다.

그는 또 65년간 접골원을 운영해 인천은 물론 김포 및 수원 등의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치료를 받았다. 김옹은 70년에 걸친 유도 인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유도인 집안으로 대를 잇고 있다.

필자의 친구인 김옹의 장남 김천기(59)씨는 송도고등학교 동창인 최재훈(전 청소년대표)씨와 각종 전국체육대회를 휩쓸며 송도고가 유도 명문고로 대를 있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또한 김옹의 유도에 대한 애정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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