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㉖ ‘양키시장’ 야전잠바 등 미제구호물자 최고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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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㉖ ‘양키시장’ 야전잠바 등 미제구호물자 최고인기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7.1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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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인천시 동구 송현동 100번지 중앙시장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유명한 양키시장이 나온다. 양키시장은 중앙시장 안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지만 중앙시장 보다 더 유명하다. 중앙시장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1935년을 전후해 한국인 박영섭이란 사람이 축현역(현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모양의 시장을 개설했다. 이어서 인천상공회 창립자 유창호가 현 중앙시장 인근 개천가에서 야시장을 운영하면서 지금의 중앙시장이 개설 돼 터전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인천부윤도 지금의 양키시장 인근에 양철지붕의 ‘인천부일용품공설시장’을 설립하고 관리를 일본인 노나까에게 맡겼다. 해방 후 중앙시장의 모습에 대해 ‘인천시사’는 8·15 광복의 부산물로 등장한 노점은 해외 귀환 동포, 실업자, 월남 난민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되었다고 전한다.

노점 상인은 곧 인천 상가를 주름잡은 새로운 유통체계로 등장한다. 보잘것없는 판자가게에서 부를 축적해 온 노점의 생성과 축재과정은 인천항 개항 초기와 흡사하다. 일본 상인과 청나라 상인 등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중구 일대에 가옥을 짓고 유리그릇, 비누, 바늘 등 일용품을 팔았던 발자취를 따라 밟았던 것이다. 이렇듯 노점상들이 각 지역마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위생·교통·치안 등 여러 측면에서 중대한 사회문제로 확산되자 사태를 중시한 당국은 뒤늦게나마 단속에 나섰다.

1960년대 중앙시장 입구. (사진제공=동구청)
1960년대 중앙시장 입구. (사진제공=동구청)

1946년 12월 8·15 광복 전의 인천일용품시장을 중심으로 소성자유시장 자치회를 조직해 노점의 규합을 시도했다. 송현동, 전동, 숭의동, 도원동 등 각처의 노점 자유상인들을 조합원으로 만들어 송현동 100번지 일대에 집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중앙시장의 근원이 되었다. 당시 인천 자유시장은 부산, 대구, 대전의 자유시장보다 규모가 컸고, 1947년의 매상고가 4억 5천만 원 정도에서 1949년에는 무려 15억 원에 달해 전국 제1위의 자유시장으로 성장했다.

원래 중앙시장에는 수문통을 거쳐 배다리로 바닷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었다. 바로 이 개천을 복개한 후 건물을 지어 시장을 만들었다. 이 중앙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폭격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한 뒤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당시 혁명군 핵심으로 인천시장을 지낸 유승원 씨가 주변을 정리하면서 판잣집을 헐어내고 구획을 정리한 후 예전처럼 지붕을 덮었다.

전쟁 전에는 대부분 남자들이 장사를 했으나, 전쟁 후부터 피난민 여자들이 좌판을 벌여 노점상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다른 주부들도 따라 장사에 나섰다. 이때 부평 등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물건을 밀거래하는 이들이 몰려들면서 이곳은 ‘양키시장’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처음엔 군복을 염색해 팔았던 이들은 점차 이익이 좋은 미제 물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장사가 순탄치 않았다. 70년대에는 경찰이나 미군 헌병들이 단속을 나오면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좌판을 들고 달아나거나 국산 물품으로 바꾸는 소동을 한 달에 대여섯 차례씩 겪어야만 했다.

현 중앙시장 삼거리. (사진제공=동구청)
현 중앙시장 삼거리. (사진제공=동구청)

전쟁 직후 미군의 원조품이 늘어나면서 미군부대에서 빠져나오는 군복이나 군용품, 통조림, 담배 등을 파는 상인들이 급격히 늘었다. 부평 미군부대 등에서 불법으로 구입하거나 한국인이 몰래 갖고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몰래 갖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애국자’라는 호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총체적인 입장에서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단순한 논리로 합법화한 것이다. 물자 부족으로 입을게 풍족하지 않던 그 무렵 청년들 사이에서는 값싼 군복(미군 야전잠바)을 사서 검은색으로 물들여 입는 것이 유행했다. 특히 ‘리바이스’와 ‘LEE'등의 원단(청바지)은 당시에도 최고의 인기 품목이었으며, 그중 흰색 원단은 부를 상징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텐트를 비롯해 버너, 코펠, 야전삽, 탄피 띠 등 미군들이 사용하던 군용 물품들이 중앙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인천시민의 애환이 담긴 중앙시장이 개발의 붐에 밀려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옛 향수만 남았다. 현재 철거 중인 이곳에 인천시는 시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과 대형 복합단지 등을 구상하며 용역에 들어가 새롭게 탄생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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