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㉓ 바다에서 육지로 변한 만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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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㉓ 바다에서 육지로 변한 만석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6.2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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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만석동(萬石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에 속했던 곳이다. 우리말로는 흔히 ‘무네미’라고 불렀는데 이는 바닷가에서 물이 넘친다(넘어온다)는 뜻의 ‘물넘이’에서 발음이 바뀐 것이다. 무네미라는 이름은 전국에서 흔한 이름으로 인천만 해도 몇 군데가 있으며 지형에 따라 해석도 다르다. 이곳 무네미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바다 쪽에 있는 마을 괭이부리와 합해지면서 만석정이 됐다. 그리고 해방 뒤인 1946년 이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만석동이 된 곳이다.

조선시대 해안방어를 위해 포대를 세워두었던 괭이부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는 괭이갈매기다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부리는 홀(忽)또는 불과 마찬가지로 마을을 뜻하는 우리 옛말을 한자로 나타낸 것으로 요쯤도 많이 남아 쓰이는 골이나 곡, 울 등과 비슷한 뜻이다. 땅 이름 연구자 가운데 이곳 만석동이 조선 초기부터 만석리로 불렸으며, 이는 옛날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남 지방에서 강화도 수로를 이용해 서울로 운반해 오던 곡식을 임시로 쌓아두던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세금으로 거둬오는 그 곡식이 워낙 많아 만석이나 된다는 뜻에서 만석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1950년대 외지에서 실려온 쌀을 만석동 괭이부리에 하역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동구청)
1950년대 외지에서 실려온 쌀을 만석동 괭이부리에 하역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동구청)

또는 우리말 ‘말돌이’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말돌이의 ‘말’은 지금도 말벌 등의 단어에서 쓰이는 것처럼 ‘크다’는 뜻이며 돌이는 빙빙 돈다는 뜻이다. 이곳이 바닷가이기 때문에 물줄기가 크게 도는 곳이 있어 말돌이라 불렸다. 이 발음이 바뀌어 ‘만돌이’가 되고 이것이 다시 한자로 바뀌며 ‘만’은 뜻과 관계없이 소리만 빌어 일만 만자를 쓰고 돌은 돈다는 뜻을 잘못 알아 돌 석자를 씀으로써 만석이 됐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말 땅이름이 이런 식으로 원래의 뜻과 전혀 다른 한자로 바뀐 경우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일거 할 수 없을 정도다. 이렇게 보면 무네미나 말돌이 모두 바닷물이 있어 생긴 이름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네미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반면 말돌이는 일찌감치 없어진 대신 만석리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 만석동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1905년 이전까지는 대부분이 바다였던 것을 일본인들이 매립해서 육지가 됐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살던 자유공원 주변의 일본 지계가 좁아지며 이곳의 갯벌 5만 평을 매립해 자신들의 땅으로 만든 것이다. 매립 후 이곳은 지금의 대한제분 전신인 일본제 분과 동양방적 등 공장들이 계속 들어섰다. 매립작업을 맡았던 이네다라는 일본인이 지역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팔경원’이라는 요정과 공창인 유곽을 세워 운영했다고 한다. 뒷날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그 뒤로 전쟁이 계속되며 경기가 안 좋아지자 이 용정과 유곽은 차례로 문을 닫았다.

그래도 그 건물들만은 관복 뒤까지 한동안 다 기울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만석동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며 여성노동운동의 메카로 불려지고 있다. 유신독재 말기인 1980년까지 4년여 동안 만석동의 동일방직은 줄곧 주목의 대상이었다. 암울했던 유신체제 당시 노골적으로 노조를 와해하는 시도에 맞서 싸운 이 회사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똥물사건“당시 똥물을 뒤집어쓴 여성조합원들의 모습. (사진제공=동구청)
‘똥물사건“당시 똥물을 뒤집어쓴 여성조합원들의 모습. (사진제공=동구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사를 언급하다 보면 그 유명한 동일방직의 ‘똥물 투척 사건’을 빼어놓을 수가 없다. 1976년 7월25일 노조 해산에 나선 경찰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이 ‘알몸시위’라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대처했다. 또 무려 4년간 계속된 동일방직 투쟁에서 사측의 노조 무력화 시도와 기관의 탄압에 맞선 여성 운동자들은 서러움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1978년 2월에 재차 노조 와해를 꾀한 사측의 사주를 받은 노동자들이 여성 조합원들 얼굴과 몸에 닥치는 대로 인분을 뿌렸다. 당시 김수경 추기경까지 나서 정부 당국과 노총에 탄압사태를 항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 사회에 화재를 불러 모았다.

독재 정권 시절 노동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여성운동에 헌신적인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 여성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모로 불린 조화순 목사를 비롯해 노조 3대 지부장으로 활동한 이 총각(인천노동연구원 원장)씨 등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이총각씨는 필자의 친구인 이철하씨 누님이다.

이철하씨 주택은 매일 경찰들의 감시 속에서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으며 부모님을 비롯해 식구들이 나서가 아무리 말려도 안 들었다고 한다. 그 후 친구 누님은 한국 여성노동의 선구자로 중앙무대에서 크게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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