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㉑ 인천최고의 부자마을 율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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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㉑ 인천최고의 부자마을 율목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5.3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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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율목동(栗木洞)1910년대부터 인천의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또는 밤나무굴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 때 일본인들에 의해 한자 그대로 옮겨져 율목리, 율목정 등으로 불리다 광복 후에 그대로 율목동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동네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는 밤골이라는 땅이름이 적지 않다.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이 율곡으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성리학자 율곡 이이선생도 고향 땅이름을 호로 쓴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밤골은 반골에서 이름이 바뀐 것도 많다. ‘은 벌어졌다는 우리말 발아 지다에서 그 발아진 모습을 나타낸 말로, 반골이 발음 때문에 방골이 됐다가 다시 밤골이 된 것이다. 또는 바깥을 뜻하는 과 골이 합해 바깥 마을이라는 뜻의 밭골이었다가 밤골이 된 곳도 적지 않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일단 이름이 밤골로 바뀌고 나서 그 동네에 밤나무가 있으면 그 나무 때문에 밤골이라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덧붙여지곤 했다.

이곳 율목동의 경우 밤골이 아니라 밤나무골로 불린 점이나 그 실제 지형으로 볼 때 반골이나 밭골에서 바뀌었다기보다는 실제로 밤나무가 있어 생긴 이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도 율목공원에 올라가 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주어먹던 기억이 난다.

율목도서관 전경. (사진제공=중구청)
율목도서관 전경. (사진제공=중구청)

1910년대부터 율목동은 인근 내동과 함께 인천의 부자촌으로 불렸다. 당시 이곳에는 부산 등 영남지역에서 인천에 올라와 능숙한 일본어를 앞세워 곡식 중개업 등을 하며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여럿 살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동네가 한산해 지금 율목공원이 있는 언덕배기에는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9천여의 일본인들인 공동묘지가 있었다. 공동묘지는 일본인들이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자국민들의 묘지를 이장해 만든 것인데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자작 벼슬을 받았던 이하영 소유의 임야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화장장도 있었는데, 이 화장터는 1930년대에 도원동으로 이사 갔다. 화장터가 이사를 갔는데도 불구하고 율목공원은 1970년대 초에도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화장장이 이사를 가자, 그 자리에 새로운 한옥주택가가 생겨나 밤나무골 새 동네라고 불렸다. 이 새 동네는 당시 서울 명륜동의 한옥 주택가를 보고 만든 것으로, 인천의 각계 유명 인사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됐다.

고 신태범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지금 율목공원에서 긴 담모퉁이 방향으로 시립도서관과 절 용운사등이 있는 이곳 언덕 일대에 당시 일본인 리키타케의 저택과 정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이렇듯 거부가 된 것에는 위조 동전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따라다녔다. 그의 이곳 집터는 9천여나 됐는데 입구에 관리인 사택이 있고, 지금 율목도서관 자리에 저택 본관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관상수와 화단으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있었던 일본인 공동묘지는 1960년대 한·일 국교정상화 뒤 일본인들이 남아있던 유해를 인수해 가면서 정리돼 율목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율목동에는 유명 인사들이 무척 많이 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송암 박두성 선생은 돋보이는 존재다.

송암 박두성 선생. (사진 제공=중구청)
송암 박두성 선생. (사진 제공=중구청)

원래 강화군 교동면이 고향인 송암 선생은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며 1920년 마침내 한글 점자인 훈맹정음을 만들어 오늘날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율목공원 언덕배기에 2층 양옥집이 있었는데 종수라는 함자를 쓰는 어르신이 살았다. 당시 이곳에는 인천에서 제일 큰 도박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작고한 필자의 부친께서도 여기에 선수로 참가했다.

밤늦게 귀가한 부친께서 가끔 큰돈을 내놓으면 다음날 밥상의 반찬이 달라지고 용돈을 타는데도 수월해 어린 나에게도 매일 밤 부친의 귀가 여부가 관심사였다. 또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곳을 찾아가면 부친의 친구분이 돈을 쥐어 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때는 적지 않은 돈을 타는 맛에 어머님의 심부름이 뜸하면 기다려지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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