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⑲ 모모산 언덕(도원동)
상태바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⑲ 모모산 언덕(도원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5.17 14:1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도원동(桃源洞)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장천리와 독각리에 속한 곳이다. 장천리와 독각리는 지금의 남구 숭의동 지역이 중심이었는데, 1906년 이 두 곳에서 일부를 떼어 붙여 도산리라는 동네가 새로 생겼고, 이것이 광복 뒤에 도원동이 됐다.

도산이나 도원은 모두 이곳에 복숭아밭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오지만, 사실 일제가 도산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복숭아 밭 때문이 아니었다. 도산리는 일본인들이 기리는 ‘도산시대’, 곧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 복숭아밭이 일부 있었다는 것은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동네 이름은 이처럼 다른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도 광복 뒤에 일본식 동네이름을 바로 잡을 때 도산을 그대로 본 따서 도원동이라 했으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제의 침략 의식을 지금의 이름에까지 그대로 간직한 셈이다.

1930년대 도산정(도원동)신작로가 생기면 여지없이 일본인 집들이 들어섰고 바다는 매립되어갔다. 망국의 한을 묻고 오는지 초상을 치른 듯한 세 부자가 언덕길을 오르고 있고, 일본 전통 복장을 한 학생이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1930년대 도산정(도원동)신작로가 생기면 여지없이 일본인 집들이 들어섰고 바다는 매립되어갔다. 망국의 한을 묻고 오는지 초상을 치른 듯한 세 부자가 언덕길을 오르고 있고, 일본 전통 복장을 한 학생이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사진제공=중구청)

1950년대 도원동 모모산(현 실내수영장)기슭에 판자촌 동네가 있었다. 이곳에는 인천에서 ‘주먹’으로 명성을 날리던 일명 골목대장이 살았다. 어깨가 넓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똑바로 못가고 옆으로 게걸음 걷듯 걸어 들어가 생긴 별명이다. 골목대장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모모산에 뛰어 올라가 체력을 단련하며 근육을 과시했다고 한다.

당시 모모산 근처에 살던 필자의 친구들도 골목대장과 한동네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만큼 골목대장의 명성은 대단했다. 또 1929년 모모산에 있던 보각사라는 절의 방 한 칸에 ‘관서학원’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생겨 성냥공장에 다니던 여공 3명이 첫 학생으로 들어왔다. 그 후 송림동에 있던 동면초등학교의 효시다.

이와 함께, 도원동에 있던 야구장(현 축구장))은 1920년대부터 ‘야구의 고장 인천’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20년대 일제는 지금의 자유공원 아래 제물포고교 자리인 ‘웃터골’에 공설운동장을 세웠다. 이 운동장이 생기자 인천에서 서울 배재학당, 중앙고보 등으로 통학하던 ‘경인기차 통학생 친목회’가 야구팀 ‘한용단’을 만들었다. 한용단의 단장은 훗날 1950년대 민주당정권에서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씨였다.

현 도원동일대
현 도원동일대. (사진제공=중구청)

인천 체육의 모태가 된 한용단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많아 종종 일본팀을 누르며 억눌린 민족의식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야구 경기의 재미도 재미였지만 일제 치하에서 마음 놓고 한국이 이기라고 소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인 심판이 판정을 잘못하면 곽상훈 단장이 뛰어나가 심판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대단한 일이었다. 이때 관중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 했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야구 시합이 있는 날이면 야구를 보기위한 관중들이 모모산 언덕에 새까맣게 모여들어 관람을 했다. 당시 야구장은 스탠드가 낮아 모모산에서 내려다보기가 수월했다.

이렇듯 야구에 대한 시민들의 열기는 지금의 프로 야구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운동장 밖에서 두 민족 사이의 대결이 벌어져 일본 경찰이 출동해 군중들을 해산시키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한용단에서 비롯된 인천야구는 1934년 웃터골 공설운동장이 도원동으로 옮겨온 뒤로도 계속 맥을 이었다. 당시 최고의 시설을 갖춘 야구장 덕분에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팀이 번갈아가며 한동안 전국대회를 휩쓸고 그 저력을 과시하곤 했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 원년의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을 역임한 김진용씨가 인고팀 현역으로 뛰었던 시절이었다.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단독] 3년차 의정부시청 여성 공무원 숨진 채 발견
  • 박정 후보 유세장에 배우 유동근氏 지원...‘몰빵’으로 꼭 3선에 당선시켜 달라 ‘간청’
  • 감사원 감사 유보, 3년 만에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산단 공급
  • [오늘 날씨] 경기·인천(20일, 토)...낮부터 밤 사이 ‘비’
  • [오늘 날씨] 경기·인천(24일, 수)...돌풍·천둥·번개 동반 비, 최대 30㎜
  • 김포시청 공직자 또 숨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