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⑭ 신포동(터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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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⑭ 신포동(터진개)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4.12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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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신포동(新浦洞)의 원래 이름은 우리말로 ‘터진 개’ 였다. 한자로는 이 말을 그대로 옮긴 ‘탁포(坼浦)라 했다. 지금은 모두 매립돼 옛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원래는 이곳에 바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갯벌이 바다 쪽으로 터져 있는 곳이 여기만은 아니다. 인천 강화도에도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네가 있다. 이곳은 인천항 개항 이후에 생긴 동네인데,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창동은 1930년대 들어 ‘터진 개’를 한자로 바꾼 개포동(開浦洞)이나 일본식인 신정(新町)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신정’은 새로 생긴 동네라는 뜻이지만 이곳은 ‘유곽촌’ 즉 사창가 동네로 통했다. 이는 지금의 답동 성당 언덕 아래나 인천여상 주변에 몸을 파는 집장촌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1930년대 카페로 유명했던3층 양식의 건물. (사진제공=인천 중구청)
1930년대 카페로 유명했던3층 양식의 건물. (사진제공=중구청)

이와 함께 지금의 신포동 주민자치센터 주변에 사교 클럽을 비롯해 바 등 대형 술집이 모여들어 이곳은 일본 이름으로 미야마찌로 통했다. 당시 인천의 조직폭력배들은 이곳으로 몰려 계보를 이어갔는데 해방 전 서울 종로에서 김두환이 주름잡던 시절 인천에는 미야마찌의 마사끼(일본 이름)를 비롯해 동구 만석동의 황포돗대(돗대처럼 키가 크다고 해서 부쳐진 별명), 도원동 골목대장(어깨가 넓어 골목길을 걸을 때 옆으로 걸어 다님)등이 활동했다.

해방 후 영화배우 장동휘씨에 이어 꼬꼬, 찰프린, 깜상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미야마찌의 계보를 이어왔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애관극장과 인천극장 등 극장 쇼에 장동휘씨가 출연하면 후배들이 무대에 올라가 꽃다발을 전달하고 장동휘씨는 후배들에게 금일봉을 하사하는 장면을 자주 봤다.

당시에는 그 장면이 후배들에게 아름답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광복 뒤인1946년 이곳이 일본식 이름을 떨쳐내고 신포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데‘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신포동에는 1940년대 후반 까지도 닭과 계란을 팔던 ‘닭 전’이 번성했다. 이곳 닭 전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닭과 계란뿐 아니라 사람들이 사냥을 해서 잡아온 참새나 꿩, 노루, 산돼지까지도 팔았다.

현 신포국제시장 전경. (사진제공=중구청)
현 신포국제시장 전경. (사진제공=중구청)

신포 시장에는 입구에 자리 잡은 신포집(약주집)과 중앙에 위치한 백항아리집이 양대 주점으로 불렸다. 부인들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동안 어르신들은 박대기를 비롯해 조기, 오징어 등 말린 생선을 직접사가지고 주점으로 향한다. 생선은 직접 구워서 먹고 약주 값만 지불하면 된다. 신포집 바로 옆에 대동강(1990년대 말 송도로 이전)이라는 고기집이 있었다. 이집은 주인이 70년대 말까지 현역 포수로 있으면서 직접 사냥해 잡아온 산돼지를 비롯해 꿩, 토끼 등 야생 동물을 주로 팔았다.

필자도 경인일보에 근무하던 시절 수원 본사에 갔다가 인천으로 오는 도중 산업도로에서 대형 트럭과 충돌하며 차 핸들이 가슴을 때려 핸들이 부러지는 대형 사고를 당했다. 그 후 가슴에 담이 들어 고생하는 것을 형수(실제 여사장)가 알고 산돼지 쓸개로 담은 소주를 한 컵 가득히 따라주어 마셨다. 지금도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쓸개주가 생각나 그때의 입안에 쓴맛이 그대로 살아난다.

물론 쓸개 주를 마시고 가슴의 담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져 필자에게는 신비의 명약으로 자리매김 됐다. 지금의 신포시장이 있는 자리에 중국인 채소 장사들이 한 군데에 모여 채소를 팔던 푸성귀전이 있었다. 일제시대 까지만 해도 우리 농민들은 무, 배추, 파, 마늘 같은 재래종 채소만을 주로 생산했기 때문에 당시 새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양파나 토마토, 피망, 연뿌리 같은 채소를 공급하던 청나라 상인들은 꽤나 으스대곤 했다고 한다.

이처럼 중국 상인들이 채소 시장에서 큰 소리를 치던 일은 6·25와 인천상륙작전으로 시내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던 시절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뒤로 이들도 차츰 사라지고 이제 이 동네에는 인천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 들어서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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