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㉜ 인천 최초의 문화주택 단지 숭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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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㉜ 인천 최초의 문화주택 단지 숭의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8.30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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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숭의동(崇義洞)은 구한말까지 인천부 다소면에 속해 장사래말(마을)이라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모두 복개되고 건물이 들어서 전혀 알아볼 수 없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바닷가에 맞닿아 동네 앞으로 갯벌이 넓게 퍼져 있었다. 그리고 동네 가운데로 기다란 개천이 하나 흘렀는데 길고 꼬불꼬불 흐르는 모양이 뱀 같다고 해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해석에 맞춰 장사래말1903긴 개천 마을이라는 뜻의 장천리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긴 자는 그렇다 해도 뱀처럼 흐르는 모양이 왜 사래라고 불리게 됐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산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난 40~50년대까지도 지금의 숭의2동 일대를 비롯해 종합운동장 주변까지 온통 밭이었다.

그 사이로 개천이 흐르며, 큰 밭은 없이 모두 조그만 밭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어 장사래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다.

장천리는 1906년에 다시 여의리, 장천리, 독각리의 3개 동네로 나뉜다. 독각리는 지금도 독갑다리라는 지명에 남아있는 이름이다. 숭의동 로터리에서 평양옥(음식점)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일대 지역을 말하는데 독각다리라고도 부른다. 이곳은 한 때 속칭 니나노집이라 했던 술집들이 여러 곳 모여 있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독갑또는 독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우리말 쪽다리, 긴 널조각 하나로 걸쳐놓은 외나무다리가 있어 외나무다리라는 뜻을 가진 한자어 독각이 동네 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옛날 이곳이 바다에 닿아있다 보니 해상 거래가 쉬워 옹기장수들이 독을 사고팔 때 주고받던 독값이 독갑으로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분명치는 않은데 이곳에 개천이 있었던 만큼 다리 때문에 생긴 이름인 것은 확실한 듯하다.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바라본 숭의동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청)
인천공설운동장에서 바라본 숭의동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청)

예전에 이곳은 시 외곽지역으로 주거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에서 종합운동장 맞은편 언덕에 화장장과 전염병자 격리원인 덕생원이 있었다.

이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던 개천에 다리가 있어 이 근방을 독갑다리라고 불렀다. ‘독갑다리는 서울의 수구문 밖 같은 음산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장사래말이나 독각리 모두 이곳에 다리를 놓아야 건널 만한 개천이 흐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옛날 이 장사래말에는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어 흔히 약물이라 부르며 즐겨 찾았다고 한다. 얼음조차 귀한 시절로 약물이 차다는 것 때문에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별로 즐길거리가 없던 아낙네들이 여름이면 장사리 약물터라 불리던 이곳으로 와서 바다 구경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이 주변에 염전이 만들어지고 바다를 매립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약물터는 결국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80년대 숭의로타리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청)
1980년대 숭의로타리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청)

이곳은 1946년 그 간의 이름과는 관계없이 숭의동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됐으니 숭의는 당시 광복을 경축하면서 예 신령들을 숭상해 뜻을 이루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60년대 들어서면서 숭의로터리에서 현 미추홀구청 방향으로 인천 최초의 문화주택 단지가 들어서며 이곳은 부촌마을로 거듭 태어났다. 숭의동에는 2010년대 후반까지 속칭 엘로우 하우스라는 집창촌(사창가)이 있었다. 이곳의 집창촌은 원래 인천항 개항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지금의 선화동과 사동 그리고 만석동, 신흥동 일대에서 주로 일본인들을 상대하며 번창했던 유곽이 차례로 문을 닫은 뒤 한 곳으로 밀집하며 생겨난 것이다.

6·25 전쟁 후 미군부대가 인천에 자리를 잡은데 이어 외국 선적들이 인천항에 몰려오며 이곳 집창촌은 전성기를 맞는데 한때 이곳에 있는 여자들을 양공주라고 불렀다.

양키들을 상대하는 공주라는 뜻으로 이들은 애국자 역할도 충실히 했는데 달러가 귀하던 시절 이들이 벌어드리는 외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신흥동에 살던 필자(초등학생)는 낙섬(금호아파트)으로 망둥이 낚시를 갈 때 집창촌 한가운데 길을 질러가며 누님들을 대했다. 양공주라 불리던 이곳 누님들에게는 이곳이 천당과 지옥을 가르는 삼정목이기도 했다.

좋은 미군을 만나 사랑을 나눈 여자는 국제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반면에 불행한 여인들은 사랑을 나누던 미군이 군 복무 후 말도 없이 미국으로 도망치듯 가버리고 나면 사랑의 씨앗으로 혼혈아만 남아 모자는 결코 남은 인생을 힘겹게 이겨내야 했다. 당시의 그때 그 누님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 행복한 여생이 되기를 멀리서나마 바랄 뿐이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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