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㉝ 한적한 포구가 개항의 중심지로 떠오른 ‘제물포’
상태바
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㉝ 한적한 포구가 개항의 중심지로 떠오른 ‘제물포’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9.06 13:3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곧잘 쓰이는 제물포(濟物浦)는 지금의 중구 중앙동과 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였다. ‘제물이라는 말은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있었던 수군 기지 제물량에서 비롯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제물량만호는 인천군 서쪽 성창포에 있다. 병선 4척과 무군선 4척으로 각 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510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제물에 대해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제수물을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인천 앞바다의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가 워낙 커서 물때에 맞춰 배를 대지 않으면 갯벌에 배가 얹혀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한자 지명들은 대부분 그 이전에 있던 우리말들을 바탕 삼아 그것을 한자로 옮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우선 고려해야 될 것이다.

또 이곳이 배가 드나드는 포구라는 점까지 따져보면 제물은 이런 해석보다 물을 건넌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할 것이다. ‘자는 건넌다는 우리말의 뜻을 따서 쓴 한자이고, ‘자는 바닷물의 을 소리만 따서 한자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는 물론 물이 들어오는 곳을 뜻하는 우리말 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결국, 제물포는 물 건너 개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이름이 언제인가 한자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옛날 우리말 이름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는 유추해 내기가 쉽지 않다. 다만 그런 뜻의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따름이다.

제물포는 인천항 개항 전까지만 해도 조그맣고 한적한 나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1883년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 조계를 만들고, 조선 침략을 위해 자신들의 상권을 확대함에 따라 동네 모습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외국인 조계가 모여 있던 이곳에 인천감리아문을 두어 개항장 일대의 행정, 재판, 치안, 조세, 외교업무 등을 처리했다. 그 뒤 인천의 중심은 원래 도호부가 있던 지금의 남구 문학·관교동 일대에서 제물포 지역으로 점차 옮겨오게 됐다.

1890년대 제물포 해안가. (사진제공=미추홀구청)
1890년대 제물포 해안가. (사진제공=미추홀구청)

제물포는 인천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여기서 제물포는 지금의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넓게는 중구와 동구 지역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19631월 당시 경인철도 숭의역이 무슨 이유였는지 제물포역으로 이름을 바뀌었으다. 그 이유에 대해서 철도청도 근거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뚜렷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원래 인천항 쪽에 있던 제물포와 문학 · 관교동 일대에 있던 인천도호부의 위치를 따져볼 때 지금의 경인전철 인천역이 제물포역이 되고 제물포역은 인천 역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향토학자들의 주장이다.

필자가 초등학교 때 제물포 역 주변은 전부 논과 밭으로 둘러져 있었다. 이곳은 신흥동 집에서 1시간 정도 걸어오는 거리로 봄철에는 미꾸라지, 여름에는 메뚜기, 가을에는 배(과일) 서리 등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놀이 명소였다.

숭의동과 제물포 사이에 위치한 인천남중학교는 필자가 다니던 학교였다. 학교를 중심으로 정문이 숭의동이고, 뒷문이 제물포 역으로 학교 주변일대에는 배나무 밭으로 둘러져 있었다. 당시 신흥동에 살던 나는 학교 뒷문을 이용해 철길을 따라 통학을 했다. 뒷문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명랑상회(무허가 판잣집). 명랑상회에서 종례가 늦게 끝나는 다른 반 친구들 4~5명을 기다렸다가 같이 때를 지어 다니곤 했다.

제물포 역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동인천고와 선인고를 비롯해 인화여고 등 철길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타 학교 학생들과의 만남도 그때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철로 위로 떨어지지 않고 누가 멀리 가나를 시합하고 지는 사람은 빵 값을 내야 했다. 집에서 지름길로 가면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340분이 넘게 돌아서 다닌 것이다. 가끔 철길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서로의 어깨가 부딪쳐 싸우는 일도 있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나만의 세상인 것 같아 그 또한 재미로 알았다.

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단독] 3년차 의정부시청 여성 공무원 숨진 채 발견
  • 박정 후보 유세장에 배우 유동근氏 지원...‘몰빵’으로 꼭 3선에 당선시켜 달라 ‘간청’
  • 감사원 감사 유보, 3년 만에 김포한강시네폴리스 산단 공급
  • 김포시청 공직자 또 숨져
  • [오늘 날씨] 경기·인천(20일, 토)...낮부터 밤 사이 ‘비’
  • [오늘 날씨] 경기·인천(24일, 수)...돌풍·천둥·번개 동반 비, 최대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