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㉟ 학익동(HID) 인천의 대표적인 집창촌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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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㉟ 학익동(HID) 인천의 대표적인 집창촌지역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10.12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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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학익동(鶴翼洞)은 한때 끽동또는 ‘HID’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중구 선화동과 답동 등지에 있던 사창가가 1960년대 초 이곳으로 옮겨온데 이어 교도소까지 들어서면서 끽동이라는 비속어로 불렸다. ‘HID’는 학익동의 영문자 이니셜로 만들어졌지만 당시 중구 신흥동에 있던 육군 첩보부대의 명칭을 사용한 은어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학익동은 문학산의 한 줄기인 학익산 아랫동네다. 구한말까지는 지금의 용현동 일대와 함께 묶여 비랭이 또는 비룡리라 불리던 곳이다. 재운 리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이 마을에 살았던 부평 이 씨 집안의 학자 이세주의 호를 딴 것이다. 학익리라는 이름은 1910년대에 들어와 처음 쓰인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연경산이라고도 불리는 학익산을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였다는 설명이다.

한편 이 동네는 학익산과 문학산 주봉이 마치 두 날개처럼 펼쳐 감싸고 있는 모습이라 하며, 동네 이름도 학골 또는 학산 등으로 불렸다.

이곳 학익동에서 문학동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도천이 고개 또는 도천현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다. 그 발음이 조금 바뀌어 대천이 고개, 도차니 고개로도 불렸는데 이는 모두 옛날 이곳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도천단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한다.

이 고개 아래가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지로 도호부가 있었는데 현재(인천 월드컵 경기장 맞은편) 인천시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도천이 고개 입구에는 예전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도천현 반석이라 불렸던 이 바위에는 전설이 하나 있다.

1950년대 문학산 서쪽 기슭마을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
1950년대 문학산 서쪽 기슭마을 전경. (사진제공=미추홀구청)

중국에서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가 들어설 무렵, 그곳 조정에서는 조선의 산세가 좋은 데다 서기(瑞氣)까지 뻗쳐 장차 나라가 크게 강해질 것으로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조선의 산세를 죽이기 위해 이름난 지관을 보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산의 혈맥을 끊어버리게 했다.

땅의 정기를 누르고 큰 인물이 태어나는 것을 미리 막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지관은 이곳 도천이 고개에 이르러서는 산세가 좋은 것을 보고 쇠기둥을 땅 속 깊이 박은 뒤 쇳물까지 끓여 붓고, 원래 건너편에 있던 이 바위를 가져다가 기둥 위에 눌러놓았다고 한다이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7대 어향이라 해서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했다.

이어 대각국사 의천 같은 인물을 낳기도 했던 문학산 주변에서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인물이 나오지 못했다는 얘기다또 이 반석이 원래는 도천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상석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한편 이 산의 기슭에는 조선 숙종 때 학산서원이 생겨 대대적인 사원 혁파작업이 벌어지는 고종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때는 현재 학익초등학교 자리에 학림사라는 큰 절도 있었다.

문학산에 오르면 옛 문학산성 일부를 복원해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 산성이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일제 이전까지 학익산 아래 학익동은 바닷물이 넘나드는 곳으로 배를 이용한 외적들이 문학산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한 산성으로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다.

학산서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학산서원 표지석. (사진제공=미추홀구청)
학산서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학산서원 표지석. (사진제공=미추홀구청)

1960년대 이후 인천 청년들이 군 입대 영장을 받으면 입대 전 친구들과 함께 들리는 곳이 앞서 언급한 끽동이기도 했다.

당시 군에 입대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공포감을 가져다줬다영장을 받은 입대 대상자들은 숭의동 운동장에 모여 용현동 입구에서 수인선을 타고 헌병들의 인솔 하에 논산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때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헤어질 때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울며불며 헤어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히 떠오른다.

그 당시 총각이 딱지(?)를 떼지 않으면 죽어서도 총각귀신이 된다는 말이 유행해, 영장 받은 친구에게 술을 취하도록 먹인 뒤 반 강제로 끽동을 데려가곤 했다.

각 지역마다 역전 주변으로 사창가가 자리를 잡은데 비해 인천은 교육의 중심지(인하대학교)인 이곳에 교육외적인 집창촌이 성행해 관계당국이 오래 동안 골머리를 앓아왔다.

인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이곳은 오래전에 집창촌이 헐린데 이어 초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학익동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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