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㊴ 80년대 인천최대의 중심지로 탈바꿈 간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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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㊴ 80년대 인천최대의 중심지로 탈바꿈 간석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11.1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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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남동구의 중심지인 간석동(間石洞)은 구한말 인천부 시절 주안면에 속해 있던 곳이다.

1914년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당시 이 일대에 있던 길촌, 석촌, 석암, 쇠파니, 풀무골 등의 동네가 한데 합해져 간석동이 태어났는데 간석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간촌의 자와 석촌의 자를 합해 간석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석촌과 석암리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간석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해석이다.

이는 행정구역 통폐합 뒤 4년이 지난 1981년 일제가 만든 이 일대 지형도에 석촌과 석암리가 있고 그 사이에 간석리가 나오는 것으로 미뤄 해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앞의 해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나중의 해석도 무시할 수 없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간석리는 그 뒤 194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일본식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가 광복 뒤 다시 간석동이 됐다. 1970년대까지도 간석동은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의 중심이 중구에서 남동구 쪽으로 옮겨오면서 빠르게 인구가 늘어났고, 이에 따라 1982년부터 90년까지 동이 세 차례 나뉘어 지금은 1~4동까지 있다.

인천의 주먹도 이때 간석동으로 옮기며 자리를 잡는다. 일제 때 인천항을 중심으로 인천을 대표하던 주먹이 6.25전쟁 후 미야마찌(신포동)와 화평동(옛 인천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70년대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제물포, 주안, 십정동, 부평 등 각 지역에서 새로운 주먹들이 태어났다.

1981년 개통된 인천 최초의 간석동 지하차도. (사진제공=남동구청)
1981년 개통된 인천 최초의 간석동 지하차도. (사진제공=남동구청)

이어 80년대 중반 천복이 파를 중심으로 주안에서 인천 최초의 조직적인 주먹이 등장하면서 인천 주먹이 새로운 전기를 만드는 계기가 된다. 80년대 후반 조직이 점차 늘어나면서 꼴망파, 식구파 등의 새로운 조직이 태어나며 간석동 시대를 열어갔다. 이렇듯 인천 주먹세계 조직의 변천사와 함께 자리를 잡은 간석동은 옛날 주안산이라 불리던 지금의 만월산 밑에 있는 인천의 중심지였다.

경인선 철도가 개설될 때 주안역이 있던 곳은 원래 주안이라는 말의 원조이기도 하다. 1910년대까지도 간석동과 그 이웃인 십정동 일대는 바다와 맞닿아 있었는데, 이 두 곳을 이어주는 곳에 그 옛날 ‘안대평’이라는 다리가 있었다.

인천에 아파트가 들어서던 초창기에 생긴 주공아파트. (사진제공=남동구청)
인천에 아파트가 들어서던 초창기에 생긴 주공아파트. (사진제공=남동구청)

임진왜란 때 한강을 건너 부평을 공격해 온 소서행장의 왜군이 이 다리에서 문학산성을 지키던 조선군과 백성들을 상대로 싸우다가 크게 패배했다고 한다. 그 뒤 이 다리는 왜군들이 싸움에 져 흩어졌다는 뜻에서 왜산교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저 전설로만 전해질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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