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㊵ 인적이 드물던 산골마을 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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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㊵ 인적이 드물던 산골마을 남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11.2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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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남동구(南洞區)나 남동공단, 남동 JC 등의 이름은 이 지역이 전에 ‘남동’이라 부르던 곳이었기 때문에 생겼다. 특히, 청년사회봉사단체인 남동 JC는 1985년 12월 전종훈 초대 회장을 모시고 인천지역에서 7번째로 창립했다.

당시 인천에는 인천 JC를 비롯해 북인천 JC, 서인천 JC, 남인천 JC 등 지역별로 이름을 붙여 봉사단체인 JC가 태동했다. 이렇듯 남동 JC가 타 지역 JC에 비해 늦게 생긴 것은 그 이전에 남동이 지역적으로 낙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천지역에서 제일 활성화된 JC로 떠오르며 전성시대를 구사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동구 일대는 지금과 달리 거의 대부분이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인천의 중심지였던 중구 일대에서는 ‘주안, 석바위, 남동 가요’라며 시내버스 안내원들이 외치는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남동은 인천의 끝자락으로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먼 시골 동네라는 인상을 주었고, 교통이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1970년대 초 버스 요금이 10원이었던(당시 자장면이 40~50원) 시절, 남동까지 버스를 타고 가 개구리를 잡던 기억이 새롭다. 인근의 밭에서 딴 깻잎과 고추 등을 듬뿍 썰어 넣고 끓인 얼큰한 추어탕에 한 잔의 소주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맛을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인천시의 구 이름이 대부분 지역마다 개성이 없이 그저 중구, 동구, 남구, 서구 하는 방식의 개념으로 붙이다 보니 남동구를 남동구(南東區)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남동도 남동(南東)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남동은 구한말까지 인천부에 딸린 남촌면과 조동면 지역이었던 곳으로, 남촌면의 남(南) 자와 조동면의(洞) 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남촌면이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곳의 남쪽 면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 기관이었던 인천부 청사가 지금의 남구 관교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대략 그 남쪽의 마을이 됐던 것이다.

1994년 만수6동 1008에 개청한 남동구청. (사진제공=남동구청)
1994년 만수6동 1008에 개청한 남동구청. (사진제공=남동구청)

조동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이는 해석이 갖가지인 우리말 이름 ‘새말’에서 조동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땅이름에 흔하게 나오는 ‘새말’은 우선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로 해석된다. ‘사이’의 준말이 ‘새’이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에는 한자로 이름이 바뀔 때 대개 간촌 정도로 바뀌곤 한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 만수중학교 근처에 조곡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반주골과 산박골 사이에 있어 ‘사이골’이라 불리던 것이 사이골 새골을 거쳐 조곡이 됐다는 것이다.

결국 두 골짜기의 사이를 말한 새골을 날아다니는 새로 잘못 알아 조곡이라 이름 붙인 것이 조동이 됐다는 얘기인데 맞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또 이 지역에 새가 많아서 ‘새말’로 불리다 이것을 한자로 바뀌어 조동이 됐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의 한자 이름만으로는 맞는 얘기지만 땅 이름은 전해오는 과정에서 워낙 변화의 폭이 크기 때문에 이렇게 단순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실제로 동네 이름을 만들어 낼 만큼 이곳에 새가 많았다는 근거 자료도 없다.

이외에도 새말의‘새’를 풀(草)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해석해 ‘풀이 많은 마을’로 보고, 이 말이 한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돼 ‘새(鳥) 마을(洞)’이 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동네의 옛 형편을 볼 때 새(鳥)보다는 풀(草)이 많아서 붙은 이름으로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는 설이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풀이 많아 쓸모없는 땅으로 오랜 기간 방치돼오던 남동이 1980년대 인천 산업단지의 메카로 자리 잡아 인천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힘입어 1994년 1월 22일 지금의 만수동 1008번지에 새로운 청사를 건립 개청했다. 내년 1월이면 30주년을 맞이하는 남동구청이 새롭게 청사진을 펼친 것이다.

이어 간교동 인근 남구(현 미추홀구) 문학동에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며 2002년 월드컵 당시 16강의 주역으로 등장, 월드컵 성지로 떠오르며 인천시민의 자긍심을 심어주데 크게 기여했다.

2002년 월드컵 성지로 떠오른 월드컵경기장. (사진제공=남동구청)
2002년 월드컵 성지로 떠오른 월드컵경기장. (사진제공=남동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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