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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메주 꽃 필 무렵
  • 중앙신문
  • 승인 2018.05.1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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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봄바람이 살갑게 등을 떠민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살랑대는 봄바람 리듬에 맞춰 두 팔을 흔들며 강둑길을 걷는다. 겨우내 춥다고 옹그리기만 하던 양팔도 봄바람을 쐬니 신이 난 모양이다. 한참을 걸어가니 오래된 한옥 한 채가 나타난다. 집 앞 남새밭에는 노부부가 괭이로 밭고랑을 타고 있다. 한옥 추녀 밑에는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짚으로 만든 새끼에 목을 매단 메주에 하얀 메주 꽃이 피었다.
어릴 적 고향 마을 뒷집에는 별명이 ‘메줏덩어리’인 동갑내기 창환이가 살고 있었다. 메줏덩어리라는 별명답게 창환이 얼굴은 네모지고 울퉁불퉁하게 생겼다. 그 친구는 집이 가난하여 그 흔한 도시락 한번 제대로 싸 오는 걸 보지 못했다. 어쩌다 학교에서 원조물자인 미제 우윳가루가 나오는 날이면 입이 함지박만 했다. 세끼 밥조차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그의 밤송이 머릿속에는 허연 버짐 흉터가 돋아 있었다. 형편이 그러하니 아예 상급학교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일찍 혼자되신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 시절 산업화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너도나도 도시로 떠나갔지만, 그는 고향을 지켰다.
“엄마 혼자 놔두고 제가 어디 갑니까.”
그는 늘 혼자되신 어머니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효자였다.
도회지에서 학교 다니다 방학이라고 고향에 내려가면 창환이 등에는 언제나 지게가 얹혀 있었다. 보름달이 훤하던 어느 여름날 밤, 그의 등에 박혀있던 지게 자국을 몰래 훔쳐봤던 기억이 난다.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등짐을 졌기에 지게 자국 흉터라니.
창환이는 젊었을 때부터 농사짓는 방법이 남들과는 달랐다. 쌀·보리농사가 주된 70년대에 그는 과감히 참외 농사에 뛰어들었다. 한겨울이면 농한기라 다들 빈둥거리며 놀 때도 창환이는 비닐하우스 속에서 땀 흘리며 일했다. 물론 참외 농사를 짓기 시작한 초창기에는 몇 번 실패도 했다.
그럴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전문 서적도 사보고 유명한 농장도 견학하는 등 발버둥을 쳐가며 꾸준히 참외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몇 년 후에는 당도 높고 때깔 좋은 참외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른바 그 유명한 ‘성주 참외’를 한 트럭 가득 싣고 서울 공판장에 갈 때면 창환이 입에는 휘파람 소리가 났다. 소득도 짭짤했다. 도시에 나가 공장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는 비교되지 않았다.
그런 친구를 몇 해 전 고향 마을 인근 산행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헉헉거리며 올라가다 보니 그냥 지나쳤다. 처음에는 서로 얼굴을 몰라봤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냥 누굴 닮은 사람인가? 하며 지나쳤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그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야 퍼뜩 생각이 났다. 어릴 때 한마을에 살던 창환이었다.
“어이! 메줏덩어리.” “야 짱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름보다 별명이 툭 튀어나왔다.

그간 간간이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맞닥뜨린 지는 오래되었다. 나 자신 그간 서울이다, 천안이다, 도회지로 떠돌아다니다 보니 고향 한번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 탓도 있었으리라.
그날 산행은 제쳐놓고 인근 식당에서 막걸리랑 파전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자식들 소식이 궁금하여 물으니 갑자기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들딸, 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아들은 ‘신의 직장’이라는 불리는 00 공사에 다니고 있고, 딸내미 또한 세칭 일류대학을 나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한다. 결혼까지 시킨 아들딸. 요즈음은 손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며 안주머니 속에 있는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손주 바보”라며 놀리는 내 얼굴을 웃으며 쳐다보는 창환이. 비록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시커멓지만 심지(心地)는 명경같이 말간 호수를 닮았다.
봄바람 한 자락이 메주 꽃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새하얀 솜털 같은 메주 꽃은 깊은 장맛을 내어 준다. 장맛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싱싱한 채소와 육질이 좋은 고기가 있어도 제대로 된 음식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신비스러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 메주는 지난겨울 그 모진 추위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심술쟁이 칼바람으로부터 뺨을 맞은 것은 무릇 기하(幾何)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 모진 한파를 묵묵히 견디어낸 보람이 있어 이처럼 고마운 메주 꽃을 달고 있다.
문득 새하얗게 핀 저 메주 꽃을 보니 고향에서 참외농사를 짓고 있는 그 친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다들 농촌을 떠났지만, 묵묵히 고향을 지키며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참외농사를 지은 덕에 지금은 하얀 메주 꽃처럼 알토란같은 자식을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메주 꽃 피는 이맘때면 유난히 그 친구가 그리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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