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겉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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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겉모습
  • 중앙신문
  • 승인 2017.08.0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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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누런 호박이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

촌부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닮은 호박이 안방 화장대 위에서 면벽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나절입니다. 아내가 호박 한 덩어리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옵니다. 굴곡이 심한 쭈그렁 호박입니다. 여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누런 호박이 생기면 창고 안이나 테라스 한쪽 구석빼기에 처박아 놓았습니다. 그런 아내가 느닷없이 안방에, 그것도 화장대 위에 놓다니. 옹골진 호박 주름을 보니 마음이 짠해서 그런가요?

호박은 자라는 땅부터 홀대를 받습니다. 밭이랑이나 토양이 비옥한 남새밭에는 언감생심 발 들어 놓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밭둑이나 냇가, 산기슭에다 둥지를 틉니다. 둥그렇게 파놓는 구덩이에 씨를 뿌리고 인분 한 바가지만 넣어주고는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런 천덕꾸러기 호박이지만 버릴 게 별로 없는 식물입니다. 어릴 적 여름이면 두레상 위에 자주 오르던 것이 호박 잎 쌈입니다. 모기떼가 앵앵거리는 여름날 저녁, 모깃불 피워놓은 안마당 살평상에 앉아 날된장에 보리밥 한 덩어리를 호박잎에 싸서 먹었습니다. 애호박은 전을 부치거나 부침을 해서 먹습니다. 동전처럼 동그랗게 생긴 ‘동그랑땡’은 술안주로 제격입니다. 늙은 호박은 호박떡을 해 먹고 호박죽도 끓여 먹습니다. 호박죽은 산후조리에 좋습니다. 요즘 말하는 참살이(Well­being) 식품입니다. 씨도 버리지 않습니다. 호박은 이렇게 젊으나 늙으나 다 쓸모가 있습니다. ‘둥글둥글 호박 같은 세상’이라는 노랫말도 있지 않습니까. 각박한 세상살이 모나게 살지 말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나에게는 고치기 어려운 벽(癖)이 하나 있습니다.

칠순을 코앞에 둔 나이인데도 허우대가 헌칠하면 속까지 꽉 찬 줄 아는 덜 여문 버릇입니다.

몇 해 전 어느 봄날 저녁, Y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고급 수필론’이라는 수업을 받을 때였습니다. 내 옆자리에 입성이 추레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은 봄 햇 볕에 그을려 시커멓고, 손톱에는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었습니다. 땀 냄새도 났습니다. 막노동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공사판에서 막일하는, 일명 ‘노가다’ 주제에 고급 수필론 강의를 듣다니…….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냉면」이라는 제목으로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람이었습니다. 수백 명이 넘는 응모자 중에 단 한 사람을 뽑는 신춘문예 당선 작가였습니다. 그날 저녁 미안하기도 해서 그 냉면을 내리 세 번이나 읽었습니다.

아내가 물걸레로 호박 얼굴을 닦습니다. 누르죽죽하던 호박 얼굴이 금세 반질반질합니다.

‘그래 맞아. 겉모습만 번지르르하면 속까지 꽉 찬줄 아는 그 못난 버릇을 이제는 고쳐야지.’

나도 모르게 아내가 쥐고 있던 물걸레를 빼앗아 호박 얼굴을 닦습니다. 아내가 무슨 생뚱맞은 짓이라며 눈을 치켜뜹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박처럼 쭈글쭈글한 아내 얼굴에 웃는 낯꽃이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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