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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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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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9.1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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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처서가 지나니 모기 입뿐만 아니라 더위 입술도 삐뚤어졌다.

지난 한철 유난을 떨던 여름 꼬리가 간당간당한다. 산사 초입에 줄지어 서 있는 배롱나무 우듬지에는 어느새 가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오늘은 일가붙이 네댓이 고향 선산에 벌초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이 뜨인다. 벽시계 눈금이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다. 엊저녁 TV 영화를 보느라 자정을 넘겨 잠자리에 들었건만, 이놈의 예민한 잠 신경이….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이른 아침인데도 벌초하러 가는 차들로 도로가 꽤 붐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조붓한 샛길로 접어든다. 길옆 단아하게 자리 잡은 고택 담장 너머로 배롱나무들이 꽃떨기를 매달고 있다. 나뭇가지를 담 너머로 드리운 채 바깥을 보고 있는 배롱나무꽃. 그도 이 댁 양반집 마님처럼 늘 집안에만 갇혀 있다 보니 바깥세상이 궁금한 것인가.

지난여름은 가혹했다. 푹푹 찌는 무더위, 태풍이 몰고 온 물 폭탄, 물러설 줄 모르는 장마, 어느 하나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그 모진 여름 날씨임에도 배롱나무는 화사한 꽃부리를 매달고 있다. 매끈한 나뭇가지 끝에 붉은 꽃술이 조롱조롱 맺혔다. 저 여린 것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질곡의 모진 세월 속에서도 칠 남매 팔 남매 마디마디 열린 조롱박 같은 자식들을 길러낸 이 땅의 어머니들이 배롱나무가 아닐까.

저 멀리 참새미골 산소가 보인다. 시커먼 양철지붕이 반쯤 뜯겨나간 낡은 정미소 앞마당을 지나, 상엿집이 있던 길모퉁이를 돌아 산소에 오른다. 길섶에는 쑥부쟁이, 벌개미취가 지천으로 피었다.

이윽고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산소 앞에 도착했다. 할아버지 내외분 산소 아래쪽에 아버지 어머니가 누워 있다. ‘윙윙’ 예취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울산 사는 사촌 형님이 무덤 주위 잡풀을 깎고 있다. 참 부지런하다. 울산, 그 먼 곳에서 새벽같이 와서 벌초하고 있다니. 매년 벌초 때마다 그러하듯이 사촌 형님과 동생들은 예초기를 돌리는 정식 이발사이고, 나는 잘라낸 잡초를 대나무갈퀴나 낫으로 걷어내는 보조 이발사이다. 한 삼십 분 일을 했을까,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어설픈 일꾼님,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다고 우리들을 얕보지 마세요, 아직도 힘은 있걸랑요.’ 시샘 많은 초가을 햇볕이 시위한다.

그렇게 더위와 싸워가며 한 벌초가 끝이 났다. 봉분이 말갛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건들마 한 자락이 묘지 주위를 훑고 지나간다.

“아 시원하다. 처녀 죽은 귀신 바람이다.”

큰형님의 우스갯소리에 묘지 주위 배롱나무가 손을 흔들어댄다.

배롱나무,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배롱나무를 조부모 산소 가장자리에 심었다. 불가에서는 무욕의 상징으로 삼았으며, 유학자들은 청백리를 떠올리는 나무라고 하면서 심었다. 그래서인지 사찰 입구나 서원 등지에서 많이 보는 꽃이다. 아마 당신 스스로 자식들이 살아가면서 올곧은 선비정신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었을 게다.

배롱나무꽃은 한번 피기 시작하면 나무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흔히 ‘나무 백일홍’이라고 부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보통 꽃은 열흘만 붉게 피고는 금세 시들어 버리는데 저 배롱나무는 백 일 동안이나 꽃을 피우고 있다니.

TV 뉴스나 신문 지상에 자주 등장하는 수갑을 찬 비리 권력자나, 돈 좀 벌었다고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졸부들의 꼴사나운 모습이 화무십일홍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배롱나무 앞으로 다가선다. 작달막하게 생긴 것이 배시시 웃는다. 비록 농투성이로 살다 돌아가셨지만 자그마한 키에 단아한 선비 모습이던 아버지를 닮았다.

갑자기 목울대가 울컥 치민다.

‘아버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깊은 속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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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2017-09-14 09:01:34
감사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장창목 2017-09-13 16:26:33
참으로 정감이 넘치고 맛갈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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