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거짓부렁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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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거짓부렁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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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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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칼럼위원, 수필가)

| 중앙신문=중앙신문 | 계절은 마음의 색깔도 바꾸는 모양입니다.

봄빛 머금은 들녘을 보니 마음까지 연둣빛 봄 색깔로 변합니다. 낡은 슬레이트 집 뒤란에는 자목련이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샘바리 봄바람 한 자락이 목련의 뺨을 훑고 지나갑니다. 지난겨울 이파리 하나 걸치지 않은 앙상한 나목(裸木) 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저 봄바람도 겉모습에 쉽게 현혹되는 세속(世俗) 인간을 닮은 걸까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용문산이 손짓을 합니다.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섭니다. 직장에서 퇴직한 뒤로는 늘 혼자 산에 오릅니다. 아내는 무얼 그리도 바쁜지? 오늘도 아침 일찍 밥상을 차려 놓고 나가버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점심때가 다 되어갑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산행을 두세 시간 하려면 김밥이라도 몇 줄 있어야 허기를 면할 터인데.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골목시장을 기웃거리다보니 허름한 김밥집이 눈에 띕니다. 단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그 흔한 간판도 걸려 있지 않습니다. 때 전 미닫이문에 ‘할머니 김밥 분식’이라고 조그맣게 써놓았습니다.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할머니 두 분이 주방에 앉아 김밥을 말고 있습니다. 바닥에 놓인 쭈그러진 양재기에는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묵은 김치, 멸치조림이 한가득 담겨 있습니다. 한 십여 분 기다렸을까요. 썰지도 않고 그냥 둘둘 말은 김밥을 빛바랜 허연 종이에 싸서 건네줍니다. 다행히 값은 쌉니다. 두 줄에 “천 원”하며 건네는 할머니 손에는 밥풀과 김치가 덕지덕지 묻어 있습니다.

산 오름 길섶에는 각시붓꽃이 다소곳이 피었습니다. 저 연약한 것이 지난겨울 혹독한 추위를 용하게 견뎌내고 꽃을 피우다니. 야생화가 아닌 비닐하우스에서 고이 기른 화초였다면 그 모진 한파를 견딜 수 있었을까? 문득 아파트 숲 속에서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라고 있는 요즈음 아이들이 온실 속 화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숨을 헐떡거리며 한 시간 가량 올라가니 산등성이가 보입니다. 혼자 먹는 아침 밥, 입맛이 없어 서너 숟가락 뜨다 말아서 그런지 시장기가 돕니다. 너럭바위에 앉아 김밥을 한 잎 베어 먹어봅니다. 뽀드득 씹히는 게 쫄깃합니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았는지 느끼하지도 않습니다. 어릴 적 소풍 가던 날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밥 맛 같습니다. 특별한 음식재료가 들어갔나 싶어 김밥 속을 살펴보니 쭈글쭈글한 무말랭이, 묵은 김치, 멸치만 들어있습니다. 여느 김밥처럼 참치나 계란말이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맛이 있다니. 이게 할머니의 손맛인가요. 다시 김밥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참 못생겼습니다. 몽땅한 게 표면이 매끈하지 않습니다. 할머니 손처럼 투박합니다. 겉모양이 보기 싫다고 그냥 딴 김밥 집으로 갔더라면…….

‘보기 좋은 떡이 먹기가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삶에서 얻은 경험이나 교훈을 담은 경구(警句)가 ‘속담’입니다. 속담은 시대가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이 속담은 명품 옷이나 성형 수술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내 고개가 가로 저어지는 이유는요?

김밥 꼬투리를 한 입 베어 물고 자근자근 씹어봅니다. 매콤한 게 입에 착 감깁니다. 못 생긴 김밥 위로 김밥 할머니의 얼굴이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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