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부부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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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부부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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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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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우체통이 입을 헤벌린 채 서 있다.

도회지 번듯한 우체국 앞 우체통이 아니다. 산골 중의 산골인 영양 일월산 둘레길 일명 ‘외씨버선길’가 우체통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리운 이에게…’라고 시작되는 풋처녀 가슴 설레는 시 한 편을 가슴에 달았다. 그것도 싱글 우체통이 아닌 부부 우체통이다. 궁합이 잘 맞는 빨간색과 연초록색 옷을 입고 오가는 산객(山客)을 맞이한다. 얼굴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새소리, 계곡 물소리, 솔향기에 취해서일까. 매연 풍기는 아스팔트 도로가의 때에 전 우체통과는 사뭇 다르다. 같이 가던 아내가 우체통 앞에서 발을 뗄 줄을 모른다.

칠십 년대 초반 경기도 양평에서 군 생활 하던 때이다. 우리 부대 통신병인 신 일병이 첫 휴가를 가고 난 후부터 일은 벌어졌다. 집으로 간지 채 일주일도 안 된 어느 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고등학교 여학생들로부터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눈보라 치는 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주시는 국군 아저씨들 덕분에 후방에 있는 저희는 두 다리 쭉 뻗고….’라는 모범 답안을 베껴 쓴 위문편지가 아니었다. ‘오빠’ 또는 ‘성한 씨’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그 시절 유행하던 펜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투였다. 나한테 온 편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편지를 받아본 여남은 동료 병사의 편지가 비슷하였다. ‘군에 오기 전 연애편지 하나는 끝내주게 썼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무전병 박 상병도 편지를 읽을 때에는 얼굴이 발갛게 물이 들었다.

그런데 바깥세상에서는 알 수 없는 부대명과 장병들 이름을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냈을까? 그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휴가를 마친 신 일병이 귀대하자 금세 베일이 벗겨졌다. 사연인 즉 서울 S 여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신 일병 여동생이 주소와 이름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쭉 돌린 모양이다. 신 일병 여동생은 그 학교의 교련 대대장이라던가, 아무튼 간부 학생으로서 학교 내에서 말마디깨나 하는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반 친구들에게 오빠와 같은 부대에 있는 국군 아저씨들에게 편지를 쓰라고 종용을 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주고받게 된 편지. 생기발랄한 여학생들의 일상이 글 속에 오롯이 담겼다.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서서 성한 오빠에게’라고 유치환의 ‘행복’ 시(詩) 구절로 시작되는 편지가 있는가 하면, 정지용의 ‘향수’를 눈 지그시 감고 읊조린다는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듯 한 얘기도 들어 있었다. 월요일이면 운동장에서 늘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 교장 선생님 훈화가 지겹다는 투정까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물대(사물함) 밑바닥에 숨겨 놓은 편지 봉투 숫자도 늘어갔다.

그 이듬해 5월인가, 여학생들이 면회를 왔다. 명분은 신 일병 오빠 면회지만 내심으로는 편지를 주고받던 우리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토요일 오후이던 그날, 부대 면회실에는 여학생 네댓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첫 대면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늘 뽀얀 피부에 해맑은 얼굴의 서울내기들만 보다가 봄볕에 새까맣게 그은 얼굴에다 빡빡머리, 추레한 군복 차림새이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굴러가는 말똥만 봐도 까르르 웃는다는 사춘기 소녀 눈에는 우리 같은 ‘땅개’(육군 보병을 일컫는 속어임)들은 영락없는 촌뜨기로 보였으리라.

빨간 등산복에 챙 넓은 모자를 쓴 중년 부인이 우체통 앞에 서 있다. 배낭에서 하얀 종이와 볼펜을 끄집어내더니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그윽한 눈길로 우체통을 바라보다가 다시 쓴다. 얼굴에는 간간이 미소가 번진다. 첫사랑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걸까.

아내가 가자며 손을 확 잡아끈다. 뭘 그리 유심히 보느냐는 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놈의 질투심은 여전하구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내 눈꼬리가 올라간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그 여인, 아직도 하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사십 수년 전의 그 소녀들도 지금 저 여자 나이쯤 되었을 거다.

그녀들도 어느 길모퉁이에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을 보면 그 옛날 국군 오빠들이 생각날까. 그래, 그 여학생들도 궁합이 맞는 저 부부 우체통처럼 오순도순 잘살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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