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산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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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산골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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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0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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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허리 구부정한 농부가 저녁노을을 등에 진 채 뜬 모〔補植〕를 하고 있다. 이앙기 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손으로 모를 심는다. 농심(農心)을 심는다. 할아버지가 모를 꽂다 말고 허리를 쭉 편다. 둘둘 걷은 바지 밑에는 백로를 닮은 가느다란 다리가 보인다. 할아버지 뒤로는 연초록색 모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저 여린 것이 땅내나 제대로 맡을 수 있을지.  저 멀리 완행열차가 들판을 가로질러 간다.

기차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앞뒷산이 등을 맞대고 있는 산골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볼 수 있어도 기차는 그림이나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날은 백일장이 열리는 김천으로 가기 위하여 뒷집 사는 기석이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교내 백일장에서 써낸 작문이 장원으로 뽑혀 학교 대표로 가는 날이었다. 여학생도 네댓 명이나 되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집에서 시 오리 떨어진 삼거리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 흔한 시계조차 없었던 때인지라 배꼽시계나 해시계로 버스도착 시각을 대중하던 시절이었다. 가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열병식 하는 군인처럼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를 따라 트럭이 가고 있었다. 흙먼지도 트럭을 뒤따라갔다.

드디어 저 멀리 고물버스가 드르릉드르릉 해수병 앓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파란 제복 차림에 앳된 얼굴의 차장(안내양)이 문을 열어 주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숙이가 손을 번쩍 들며 옆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같은 반 여학생인 숙이도 오늘 백일장에 같이 가기로 되어 있다. 시를 쓴다는 숙이. 단발머리에 얼굴이 갸름한 그녀를 보니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 두어 시간을 가니 김천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난생처음 이렇게 멀리 오기는 처음이었다. 기껏해야 아버지를 따라 집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고령장에 가본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기차다~”라는 고함이 들렸다. 너도나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커덕철커덕’ 시커먼 기차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길이가 엄청나게 길었다. 꽥! 소리까지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차 위 화통에는 흰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신기했다. 저게 기차구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모두들 저만치 멀어져 가는 기차 꼬리에 눈을 뗄 줄 몰랐다.
 
꽥, 들판 너머로 중앙선 열차가 지나간다. 벼 포기 사이를 겅중겅중 다니던 백로 한 마리가 기차 고함 소리에 놀라 날아오른다. 뇌리 속을 유영하던 추억 한 자락도 백로를 따라 가버린다.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햇살이 산자락을 베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 산 그림자도 마을 언저리에서 서성거린다. 오전만 해도 발정 난 삽사리처럼 기운 이 펄펄하던 햇살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오느라 진이 다 빠진 모양이다.
어느 책에선가 ‘인생 시계’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24시간에 비유하고,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세쯤 된다 치면 칠순을 코앞에 둔 나는 하루 중 몇 시에 해당하는 걸까? 대략 저녁 7시가 조금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열 살이 넘어서야 기차를 처음 봤던 산골 아이들. 그들도 저 비스듬히 누운 햇살처럼 가벼운 몸피에다 얼굴에는 저녁 7시의 그늘이 씌어 있을 게다. 다들 어디에서 정 붙이며 살고 있는지. 오늘따라 가슴 저리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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