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허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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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허제비
  • 중앙신문
  • 승인 2017.11.0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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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시월의 끝자락, 온 산하가 울긋불긋 불타오른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버려야 할 것을 아는 순간 나무는 가장 붉게 제 몸을 태운다.’라고. 내 가슴 속에도 불덩이 하나를 삼킨 듯 뜨거움이 번진다.

해거름 녘, 집 앞 사그내 둑길을 걷는다. 거랑(川) 너머 빤히 보이는 논에는 앞니가 듬성듬성한 콤바인이 게걸스럽게 나락(벼)을 먹으며 걸어간다. 뒤꽁무니에는 볏짚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볏짚 덩어리가 질퍽한 논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개미에 알곡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던 저 볏대. 이듬해 농사의 밑거름이 볏짚인데도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다. 번지르르하게 성공한 이 뒤에는 저 볏짚처럼 자양분이 되어준 등 굽은 부모님이나, 허리통 굵은 아내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출세하고 나면 저 혼자 잘나서 된 양 경망을 떠는 이도 있다. 알곡만 쏙 빼먹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저 콤바인처럼.

들녘 외딴집 앞에 이른다. 아래채 가마솥 아궁이 앞에서 허리 구부정한 노파가 솔가지를 태우고 있다. 굴뚝에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로 올라간다. 문득 사십 년 전에 영면하신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그 옛날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맘때이면 어머니의 무명옷 소맷자락에는 솔가지 타는 냄새가 배어 있었다.

툇마루 위 빨랫줄에는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무청실가리가 걸렸다. 뒤란에는 대처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나눠줄 김칫독이 묻혀 있으리라. 자식 낳아 젖 물리며 키우다 보니 살결은 꺼멓게 변하고, 뼈에는 구멍이 숭숭 나버린 우리 어머니들. 내리사랑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늙은 부모의 자식 사랑이 안마당에 일렁인다.

가을바람 한 자락이 들녘 가운데로 자맥질해온다. 공기가 서늘하다. 찬 공기가 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옷을 껴입고 가세요.” 아내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당신 하는 모양새가 늘 그렇지 뭐.” 입 삐죽거리는 아내의 잔소리가 귀에 앵앵거린다.

벌거벗은 들녘에는 해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가 찬바람에 떨고 있다. 지난봄 맞춰 입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가 너덜너덜하다. 주인은 지난 한 철 참새 떼 쫓는 허수아비의 수고로움을 잊었는가? ‘토끼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라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따로 없다.

어릴 적 많이 들었던 ‘허제비’라는 말이 떠오른다. 제구실을 못 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빗대어 일컫는 방언이다.

나는 몇 해 전 사십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퇴직하고 집에서 쉬니까 처음 얼마 동안은 솔직히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으니 그게 아니었다.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데 나 혼자만 소외된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토록 자주 울어대던 휴대전화도 벙어리저금통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차츰차츰 외톨이가 되어 갔다. 뼈저리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기까지 했다. 살갑게 대하던 마누라도 전 같지 않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장가보낸 자식들도 제 어미 하고만 이야기한다. 어쩌다 이야기라도 거들라치면 피하는 눈치다. 내가 저 허제비 일까?

빈 밭에는 한 노파가 저무는 해를 등에 진 채 깻단을 털고 있다. 저 멀리 산등성마루 위에는 온종일 대지를 달구던 해가 턱을 괴고는 눈을 찡긋한다.

“백수 양반! 저 울긋불긋한 산을 보세요. 그게 나무 생에서 가장 찬란한 때입니다. 은퇴한 당신, 지금이야말로 저 단풍처럼 생의 가장 찬란한 때입니다. 당신은 결코 허제비가 아닙니다.”

한마디 던지고는 산등성 너머로 숨어버린다. 저녁노을이 서녘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

“그렇지 어깨에 짐을 벗어버린 지금이 내 생에서 가장 좋을 때 일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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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성 2017-11-08 20:52:06
허제비가 이런 뜻을 가진 말 이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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