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칼럼]꽃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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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칼럼]꽃신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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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2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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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슬레이트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마을이 훤해졌습니다.

마을 어귀에 만들어 놓은 꽃밭 때문입니다. 꽃내음이 진동합니다. 형형색색의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나팔꽃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습니다. 눈어림으로 봐도 열댓 종류나 됩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어릴 적 골목길을 쏘다니며 불렀던 동요가 생각납니다.

등이 구부정한 할머니가 갈라진 흙살을 뚫고 올라온 채송화와 눈 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꽃신 할머니입니다. 꽃무늬를 새겨 넣은 신을 신고 다니는 할머니를, 동네 사람들은 ‘꽃신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할머니의 등 뒤로 유월의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이곳이 꽃밭으로 변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원래 기와집이 서 있던 자리입니다. 그 집에서 평생을 사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빈집이 되어버렸습니다. 낡고 오래된 집에다 돌보는 이가 없으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지붕은 내려앉고 벽은 허물어졌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잡풀만 무성한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몰래 내다버린 쓰레기가 쌓여가기 시작했습니다. 음식물 찌꺼기에다 비닐봉지, 헌옷가지, 찌그러진 냄비 등 온갖 잡동사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여름이면 악취로 코를 막고 지나다녔습니다. 냄새 때문에 이웃 간에 다투는 일도 잦았습니다. 마을 이장(里長)이 방송이나 모임 석상에서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해봤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삼대가 망한다.’라는 다소 섬뜩한 푯말까지 세워 놓았을까요. 그러나 보니 자연히 이웃 간에 정도 멀어지고 인심도 흉흉했습니다.

그러한 마을이, 꽃신 할머니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 뒤로부터 달라졌습니다. 그 지난해 봄입니다. 할머니 혼자서 한 스무남은 평 되는 이 빈집 안마당을 꽃밭으로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잡다한 쓰레기를 걷어내고 괭이와 삽으로 밭이랑을 만든 다음 꽃을 심었습니다. 꽃 종류도 윤기 나는 꽃이 아니었습니다. 채송화, 봉숭아 등 골목길이나 흙담장 위에서 흔히 보던 꽃입니다. 할머니는 햇볕 쨍쨍 내리쬐는 여름에도 쉬지 않고 꽃을 돌봅니다. 풀도 뽑고 비료도 주고 목이 마를까 봐 물까지 주는 등 마치 자식 키우듯 했습니다. 어떤 날은 도회지에 사는 아들과 손주들이 우 몰려와서 거들어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꽃밭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일이 사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끼리 아근바근 다투던 일도 없습니다.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던 사람들이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오늘 아침,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생머리 처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맨드라미 향기를 맡습니다. 맨드라미도 처녀의 미모에 반해서인지 활짝 웃습니다.

마을 앞 철로 위로 중앙선 열차가 지나갑니다. 처녀와 눈맞춤, 아니 입맞춤을 하는 맨드라미를 보니 샘이 나는지 꽥! 소리 지르며 지나갑니다.

갑자기 물음표(?) 두 개가 떠오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변한 것은 꽃신 할머니의 땀 때문인가요? 아니면 여리고 고운 꽃들의 웃음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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