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⑩ 전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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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⑩ 전환국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3.1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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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요즘 우리의 전통 술인 막걸리 열풍이 대단하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나 볼 수 있던 막걸리가 백화점은 물론 일본에 수출된다고 하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다. 막걸리가 급부상 한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숙취를 줄여 애주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막걸리는 악취를 발생시키고 숙취로 인해 머리가 아픈 술로 각인돼 왔으나 이를 과학적인 체계를 거쳐 해소시킴으로 애주가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술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70년대 중반 동네마다 막걸리(대포집) 집이 성업했으나 그 중에서도 전동의 큰 항아리집(일명 전동집)이 제일 유명했다. 마당 한가운데 큰 항아리를 묻어놓고 찌그러진 노랑 주전자에 퍼 담아주던 막걸리와 푸짐한 삼치, 그리고 계란말이 등 인천 애주가들의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땅속에 독을 묻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이가 시리지 않을 정도의 온도로 술을 마시기에 딱 좋게 보관돼 애주가들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다.

특히 전동집의 술 맛이 좋은 데는 물맛이 한몫을 했다. 전동 집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인천양조장이 있었다. 이 곳은 자유공원과 연결되는 수맥에 지하수를 뚫고 약수를 받아 술을 만들어 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자유공원 홍예문에서 축현초등학교 방면 4거리에 약수탕(대중목욕탕)이 들어서 2000년대 초까지 운영하며 이곳의 물맛을 대변해 왔다. 당시 9급 공무원의 월급이 1만원 안팎이던 시절 막걸리 1(2L) 50, 삼치 1접시 50원으로 서민들이 이용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옛 전환국. (사진제공=중구청)
옛 전환국. (사진제공=중구청)

골목 안에 있던 인하 집은 헐리고 현재 도로변으로 이전한 인하 집을 비롯해 길가에 10여 곳의 막걸리 집이 들어서 서민들을 상대로 성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전동(錢洞)은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한 야트막한 산지였다. 1892년 이곳에는 현대식 화폐를 만드는 기관 전환국이 설치돼 1900년 서울 용산으로 옮겨갈 때까지 운영됐다.

지금은 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는 옛 인천여고의 운동장 자리가 바로 이 전환국이 서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전환국은 원래 고종 22년인 1885년 조선 정부가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소공동에 처음 만들었다. 독일에서 화폐 만드는 기계를 들여와 이곳에 설치하고 이전까지 사용하던 상평통보 등을 대신한 이른바 신신 화폐를 만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 동을 수입해 이곳에서 동전을 만들었는데 그 동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현대식 건물로 이전해 영업중인 전동집. (사진제공=중구청)
현대식 건물로 이전해 영업중인 전동집. (사진제공=중구청)

그러다 보니 이를 서울로 다시 운반해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컸기 때문에 항구에서 가까운 곳에 돈을 만드는 곳을 조성하기로 하고 전환국을 서울에서 전동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환국을 만들기는 했어도 이 기관의 실권은 일본인들에게 있었다. 개화파 인사인 박정양 등이 관리직을 맡기도 했지만 나라가 점차 기울어 가는 형편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었다.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인들이 조선의 돈을 마음대로 찍어내고 주물렀던 것이다.

이곳에 전환국을 만드는 데도 정부에 돈이 없어 일본인 실업가에게 돈을 빌리고 공장운영에 필요한 자재 공급에서 감독까지 모두 그들이 맡도록 계약해야만 했다. 여기에 청나라 간섭까지 한 몫 거들었다. 운영 초기 이곳에서 만든 주화에 인천전환국대조선이라고 표시한 것을 놓고 원세개가 자를 없애라고 요구해 일부 동전이 유통되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1893년에는 전환국의 운영권을 놓고 일본인들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 경영이 어려워진 것을 기회로 우리 정부가 돈을 주고 경영권을 인수했다. 하지만 경비와 기술부족으로 주화 제조가 자주 중단되는 굴곡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광무 4년인 1900년 전환국은 다시 서울 용산으로 옮겨가는데 이는 바로 전해인 1899년 인천~노량진을 잇는 경인철도가 개통됨으로써 수입한 동을 서울로 옮기는 일이 수월해 졌기 때문이다.

전환국이 서울로 다시 옮겨간 뒤 인천부 부내면에 속해있던 이곳에 새로 마을이 생기고 1906년 부내면이 동을 몇 개 늘릴 때 전환국이 있었던 이유로 전동(典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전환국 건물은 1926년 헐려 인천여자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지금은 인천여자고등학교도 연수구로 이전해 현재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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