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⑪ 송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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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⑪ 송학동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3.22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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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지금은 사라진 지명이지만 송학동(松鶴洞)은 인천을 대표하는 곳이었다. 한때 인천에서 최고의 부를 상징하며 명성을 떨치던 곳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또 한편으로는 답동의 인하공사(현 국정원 인천분실))와 함께 송학사(육군 방첩대)가 인천을 대표하는 정보기관의 산실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자유공원에서 홍예문의 남쪽 언덕 지역으로 인천항 개항 당시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있었다. 자유공원 일대에 만국지계 또는 각국지계라 불리던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생기자 그 안에 편입됐다. 이때까지도 별다른 동네 이름이 없다가1912년 일제가 자기들 방식으로 산수정(山手町)으로 부르다 광복 뒤인1946년에 송학동이 됐다. 송학동은 이곳 언덕이 소나무가 울창하고 운치가 있는 곳이라 붙인 이름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 버린 지금으로서는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길을 지나가면서 쳐다만 보아도 등골이 오싹하던 옛 인천경찰서, 그리고 송학사(현 기무사),인성 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위치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최고의 관람석을 자랑하던 시민회관, 인천 최초의 카바레, 사교모임의 장소로 널리 알려진 옛 제물포구락부회관 등이 송학동의 명성을 대신했다. 이와 함께1892년 미국 상인 타운센드가 옛 인천경찰서 자리 아래에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최신식 정미소를 만들어 운영해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원래 광산기사이던 그는 이에 앞서1885타운센드 상회를 세우고 화약과 석유를 수입하거나 은행대리점을 운영하며 토목사업 등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는 이 밖에도 석탄이나 소가죽 수입 등 돈벌이가 되는 것이면 모두 손을 대 당시 세창양행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큰 회사를 일궈냈다. 이렇게 벌은 돈으로 정미소를 세운 것인데, 이곳에서는 쌀을 찧던 기존의 우리 방식과는 달리 증기 동력이 딸린 고급 기계를 이용해 훨씬 곱고 깨끗한 입쌀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타운센드라는 발음이 익숙하지 않았을 당시 인천사람들은 그를 담손이라고 부르며 방앗간 또한 담손이 방앗간이라고 하며 많이 찾았다고 한다. 특히1960년대 초 시민회관에서 개봉하며 당시 최고의 관람객을 기록한 장동희 주연의 ‘5인의 해병’, 신성일 주연의 빨간 마후라등은 연일 만원사례를 이루며 인천사람들을 송학동으로 끌어들이는 데 한 몫 했다.

초등학교5학년이던 필자도 영화를 관람하고 싶은 욕심에 친구들과 함께 시민회관 밖 후문 쪽3m높이의 언덕에서 뛰어내려 화장실 창문을 넘어 훔쳐 들어가곤 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든가, 한번은 기도(문지기)한테 잡혀 몽둥이찜질에 이어 화장실 청소라는 임무를 마치고 나면 이를 불쌍히 여긴 기도가 영화를 관람케 해주었다.

시민회관. (사진제공=중구청)
시민회관. (사진제공=중구청)

그 후 기도를 삼춘이라고 부르며 화장실 청소에 이어 잔 심부름 등을 해주는 보답으로 우리에게는 공짜 관람이라는 특권이 생겼다.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였다. 영화관은 화장실이 깨끗해져서 좋고 우리는 영화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공짜로 구경해서 좋은 것이다. 또 송학동 17번지에는 시 지정 유형문화제로 중구문화원이 들어서 있는 옛 제물포구락부회관 건물이 있었다.

구락부란 함께 즐기는 모임이라는 뜻으로 요즘의 동호인 모임 정도가 될 텐데, 영어의 클럽(club)을 일본인들이 그와 비슷한 발음으로 표현한 음역 단어다. 한 때 큰 인기를 끌었던TV드라마피아노의 촬영지로도 쓰였던 이 건물은1901년에 지어져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의 사교장 용도로 사용됐다. 당구장과 사교장, 테니스장 등을 두루 갖추고 있던 이곳에서는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모여 늘 웃고 즐기며 흥청거렸다고 하니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한편 송학동 제일교회 밑 산기슭에는 청나라 외교관 출신 오례당이 살았는데1909년에 지은 독일식의 이집은 존스톤 별장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의 이름에 자가 있어 오례당이 그대로 집 이름으로 통했고, 사람들은 이를 흔히 오리당이라 부르곤 했다. 이 건물은 광복 뒤에 육군 방첩대(송학사)가 사용하다가 19684월 불이 나서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자주 다니던 우리는 이곳이 무시무시한 송학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타 지역에서 온 학생들은 으쓱한 이곳이 사람들의 눈에 안 띄는 것을 이용해 담배를 피웠다. 그러면 여지없이 사복 군인이 나타나 학생들을 혼내 준데 이어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어디 학교 몇 학년 누구냐며 겁을 잔뜩 준 뒤 영락없이 누나가 있느냐, 미인이냐, 누나와 함께 놀러 오면 맛있는 것을 사준다는 등 유혹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학생들은 겁을 잔뜩 먹은 채 서로 자기 누나가 예쁘다, 한번만 봐주면 누나를 꼭 데려 오겠다는 식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곤 했다. 물론 군인 아저씨들도 뻥인 줄 알면서도 장난삼아 그런 것 같다.

지금은 송학사가 부평으로 이전해 자유공원 돌담길에는 아득한 추억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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