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① 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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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① 배다리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1.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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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필자는 1953123일 인천 중구 관동22번지에 태어난 인천의 토박이다.이에 잊혀져가는 인천의 옛 지명을 찾아 그 유래와 역사 및 배경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천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에게 잊혀져 가는 인천 역사의 한 면을 알리기 위해서다. 다만 본인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지면에 담다보니 지역별로 분량에 차이가 있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한다.

우선 개항 이전 인천 최대 중심지였던 동구 금창동(현 창영동)의 배다리를 먼저 소개한다. 조선시대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경기도 수원시 병점의 융건릉에 능행하기 위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배다리를 만들어 이용했다.

정조의 수행 길을 책임진 정약용이 고민 끝에 수백 척의 배를 옆으로 길게 늘어뜨리고 그 위에 나무판을 깔아 임시로 만든 다리(부교)를 그때부터 배다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다리가 인천에도 있었다. 19세기 말까지 밀물 때가 되면 중구 경동과 동구 창영동 사이의 갯골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때 양쪽으로 갈라져 사는 사람들이 교통수단 삼아 목선을 연결해 오갔다. 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었다고 해 이때 붙여진 이름이 배다리다.

60년대 배다리. (사진제공=동구청)
60년대 배다리. (사진제공=동구청)

인천 역사의 산책에서배다리는 빼놓을 수 없는 주역이다.

필자도 60년대 말 학창시절 등하교 길에 배다리 철교 위를 건너다녔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아있다.학우들과 철로를 걸으며 누가 오래 동안 철로에서 떨어지지 않고 멀리 가는 내기를 했다. 지금은 불과10m가기도 힘들지만 당시에는50~100m씩 걸어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내기의 결과는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 꼴 밤(딱밤)을 때리는 것이었지만 승부욕 많큼은 대단했다.

물론 등·하교 길의 지루함을 메워주고 발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보너스가 뒤따랐다. 기계체조로 단련된 필자는 몸에 균형이 잘 잡힌 덕분에 져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배다리를 빠져나온 우리일행은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네(배길선)페인트 가계로 향했다.아버지와 하교 후 교대를 하면서 페인트를 판돈을 빼돌려(삥땅)빵 가계를 자주갔다.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페인트를 깡통으로 사가는 사람보다는 한 홉씩 사가는 사람들이 많아,재고 파악이 안돼 수입이 짭짤했다.

배다리는 경인선 전철이 지나는 철교 아래 중구와 동구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으로 경동,송현동,창영동 일대를 말한다. 개항장에 주둔한 일본인들에 의해 내몰린 조선인들이 하나 둘 모여 형성했다는 배다리 일대는 이후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포함해1960~70년대에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지방 사람들로 붐볐다. 1897322일 오전9시 인천부 오각리(현도원역 인근)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정부의 고위관리들과 인천 주재 각국의 외교관,미국의 알랜공사,기술자 타운센트와 커알리,공사 총감독 콜부란,인부350여명이 모여 역사에 남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놓기 위한 기공식을 갖고 배다리의 역사를 새로 만들었다. 1899년에 개통된 경인선은 인천의 제물포와 서울의 노량진 사이32.2km노선에 증기기관차4,객차6,화차28량이 투입돼 당시에는12회 왕복 노선으로1시간30분이 걸렸다.경인선응 그 후 배다리와 화평동에 철교가 건설되며 지금의 하인천역까지 이어졌다.화평동의 철교를 화평철교라고 부르는데 비해 배다리철교는 그냥 배다리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배다리. (사진제공=동구청)
현재 배다리. (사진제공=동구청)

배다리 일대에는 아직도 유서 깊은 우리네 터전과 문화유산 등이 많이 남아있다.

학구열을 불태우며 헌책을 사고팔던 헌책방거리를 비롯해1920년 문을 열고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린 인천양조장의 인천탁주(현 소성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창영초등학교,여선교사기숙사,양키시장,그리고 인천을 전국에 알린 유행가인천의 성냥공장등이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이렇듯 인천의 문화유산과 서민 삶의 자취가 화석처럼 남아있는 곳,배다리는 인천 역사의 산실로 인천인의 가슴속을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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