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③ 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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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③ 청관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1.1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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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지금은 차이나타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인천 토박이들은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를청관(淸館)거리라고 부른다. 이곳은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중국인 마을로 인천시민은 물론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와 정통 중국의 대륙 맛을 느끼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청관은 공식 지명이 아니다. 구한말 우리나라 사람들이 청국조계를 통칭해 부르던 말이다. 인천에 청관이 들어선 데는 정치적인 배경이 있었다. 고종21(1884)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국은 일본이 자기네보다 먼저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조계를 설정하자 서둘러 통상조약을 맺었다. 체결 후 청국은 북성동 일대 약15천여를 조계로 정하고 영사관을 설치했다. 현재 인천 화교소학교가 들어선 자리에 이사부라는 이름의 청국영사관이 있었다. 청나라의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오랜 기간 청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왔으나 지금은 차이나타운으로 불려오고 있다.

청관은 지금의 중화루에서 한국회관을 거쳐 인천역으로 향하는 언덕길 양쪽의 시가지로 현재 북성동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큰 길이 제일 번화가였다. 이곳에1895년 주한 총리 원세계를 따라 들어온 동순태를 비롯해 동화창, 인합동 등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가 줄지어 들어섰다. 이들 대화상들은 천일염을 비롯해 고추, 잡곡, 지물류를 싫고 들어와 건어물과 해삼, 새우살, 조갯살 등 해산물을 갖고 나갔다.

빠른 속도로 번창하던 청관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청관의 상권은 거의 마비되고 일부 요리집과 잡화상들이 남아 명맥을 이어갔다. 이렇듯 쇠퇴기를 보이던 청관은 중국인들만이 갖고 있는 단결력을 앞세워 제2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웃의 상점을 마다하고 1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중국인 상회를 찾아가 물건을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가 다르게 번성하던 청관은 1960년대 이후 우리 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펴 또 다시 쇠퇴기를 맞게 된다. 이후 90년대 들어 인천시와 중구청은 청관을 개발해 관광도시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차이나타운으로 명칭을 바꾸고 많은 예산을 들여 오늘날의 관광지로 탈바꿈 시켰다. 지난 2000년도 중구청은 자매결연을 갖은 중국 웨이하이에서 페루를 기증받아 하인천역 맞은 편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웠다.

악귀를 막아준다는  페루. (사진제공=중구청)
악귀를 막아준다는 페루. (사진제공=중구청)

페루는 중국인들이 오래 전부터 마을입구에 세워 악귀를 쫒아 낸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시설물(기둥)로 중국인들 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2005년 중구 항동 제물량로 238 2889에 지상 4층의 한중문화관을 건립 차이나타운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이어 한중문화축제를 매회 정기적으로 개최, 관람객(지난해 33000명 방문)들에게 더 많은 볼거리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 했다. 또 중구청에서 차이나타운을 돌아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관우 및 장비 등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벽화를 만들어 관광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사자탈춤 시가행진. (사진제공=중구청)
사자탈춤 시가행진. (사진제공=중구청)

한때 청관에는 인천에 사는 3천여 명의 화교 가운데 500명 정도가 모여 살며 화교학교를 설립, 청관의 번성기를 느끼게 했다. 청관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특히 중국인들의 명절은 유별나다. 설날 제야놀이부터 원소절이라고 불리는 대보름날에 끝나는 춘절15일 동안 청관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집집마다 복을 기원하는 글을 빨간 종이에 써서 붙이고 색등을 걸었으며 해가 저물면 긴 장대 끝에 폭죽을 수백 개씩 달아놓고 불꽃놀이를 즐겼다. 그 중에서도 자유공원을 거쳐 동인천, 신포동으로 돌아오는 시가지 가장 행렬은 최고의 인기였다. 불을 내뿜는 사자탈춤을 비롯해 삼국지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분장하고 또 소림사에 나오는 무예솜씨를 뽐내며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는 곡예를 펼치는 행진에 몰려든 군중은 넋을 잃었다.

중국인들은 가장 행렬 중 몰려든 관중들에게 월병(빵과 과자의 중간)을 나눠주며 인기를 누렸다. 그 때는 월병이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 세월이 지나 최근 차이나타운을 찾아 월병을 사 먹었으나 옛 맛은 간데없고 추억만 남았다. 이에 당시의 인천시민들은 날로 번창하는 화교들이 샘이나 청관에 가면 중국인들이 인질로 잡아 본국으로 보낸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청관으로의 발길을 막기도 했다.

어린 시절 청관에서 10분 거리인 답동에 살던 필자도 어른들을 따라서는 갔으나 친구들과는 간 기억이 없다. 그 후 청년 때는 지금의 처와 연애를 할 당시 청관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해 처가인 만석동(동일방지 인근)까지 데려다 주곤 했었다. 데이트 장소로 신포동을 많이 이용했는데 집사람이 겁이 많아 늦은 밤에 컴컴한 청관 길로 혼자 보낼 수 가 없어서 항상 바래다 준 것이다. 하인천 역 앞으로 돌아가면10분 이상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집사람의 손을 꼭잡고 청관을 넘어 다녔다. 청관에 접어들면 가로등하나 없이 어두운 길에 유독 황해여관만 환하게 불을 밝혀 길손님을 안내해주던 기억이 새롭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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