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 를 찾아서 ⑤ 70년대 싸리재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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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 를 찾아서 ⑤ 70년대 싸리재 언덕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3.02.0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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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인천의 구도심으로 신포동과 송현·송림동의 큰 길가 그리고 중앙시장 등이 거론되지만 옛 인천의 대표적인 저자거리는 내동과 싸리재 마루턱이었다. 일제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인천은 서구문물 유입의 통로로 각 나라 상품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새로운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오며 저자거리에는 신기한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속속 생겨났다.

개항 초만 해도 인천 자체만으로는 물자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 내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거주자 증가와 국내 각지로부터 이주해온 유입 인구로 인천은 점차 도시로서의 활기를 띄게 됐다

1920년대 말을 전후해서는 지금의 배다리~경동사거리~신포동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며 특히 싸리재가 핵의 역할을 했다.싸리재는 배다리를 지나 경동사거리에 이르는 고갯길로 싸리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름을 얻게 됐다. 초창기에는 단연 주를 이루던 포목전과 양화점이 싸리재길을 따라 성업했다. 싸리재에서 주단포목을 처음 연 사람은 서울서 내려온 주명기·주봉기 씨 형제였다. 주봉기 씨는 형으로부터 독립해 내동에 포목점을 내면서 입구에 유성기(손으로 돌리는 전축)를 돌리며 선전을 했다고 하니 그의 탁월한 장사 수완에 감탄할 만하다.처음 보는 유성기 소리에 이끌려 몰려드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포목전과 함께 구두도 당시 크게 유행했으나 서민들이 구입하기에는 가격이 워낙 비싸 엄두를 못냈다.구두 한 켤레 값이 쌀2~3가마니 값과 맞먹었다니 구두가 얼마나 비싼 사치품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후 양화점 사이에 양복점과 양품점들이 들어서면서 싸리재가 명실상부한 인천 유행1번지로 자리매김했다. 양화점은1885년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양복과 양장 차림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생겨난개화 풍조의 하나였다.최초의 양화점은 애관극장 맞은편 삼성태였으며 해방 후엔 백마양화점서울양화점이 문을 열고70년대 초까지 번창했다. 그 후 금강제화 및 에스콰이어 등 브랜드를 내세운 기성화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걸었다

60년대 경동사거리 (사진제공=인천 중구청)
60년대 경동사거리 (사진제공=인천 중구청)

70년대를 넘어서며 양화점은 경동사거리, 내동길로 몰리고 포목전은 배다리 중앙시장으로 이전해 현재에는 대부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한편 싸리재는1952년 율목동에 기독병원이 설립된 이후 약국과 개인병원들이 속속 들어서자 한동안 인천의 의료타운으로 떠올랐다. 싸리재약국은 인천에서 제일 큰 약국으로도 유명했지만 진짜 유명세를 떨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천은 타 도시와 달리 전쟁 이후 월미도와 오폰드(연안부두 입구 삼익아파트자리)에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선화동(신흥시장 내)과 숭의동에 자리 잡은 집창촌 여성들을 일명 애국자또는 양공주라고 불렀다.미군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달러를 벌어들인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내국인들도 이곳을 많이 이용했는데 임질세멘바리등 성병이 유행했고 싸리재약국은 이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약을 조제해 팔았다. 뛰어난 약효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국으로 퍼지며 몰려드는 손님들로 약국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다.

싸리재는 인천 최초로 서양식 예식문화를 갖춘 신신예식장을 비롯해 애관극장, 음악다방, 당구장 등이 들어서면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당시 필자는 친구들과 신신예식장 바로 옆에 있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먹고 가위,바위,보를 한 뒤 꼴지(인오꾸리)가 맨 뒤에서 도망치는 장난을 즐겼다. 물론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고 잡힐 경우 부모님에게 연락해 음식 값을 변상해야 했다. 개범이란 친구는 친구들과 짜장면을 먹은 뒤 내기에 져 혼자 남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 친구는 짜장면 4그릇 값에 중국집2층에서 골목길로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점잖게 중국집을 나와 건너편 골목길에서 친구의 무사 탈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는 보이지 않고 비명 소리만이 어두운 장막을 뚫고 들릴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자장면 한 그릇에 목숨을 걸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그립다

남용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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