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교수의 음식이야기] 갈비집의 시대별 성장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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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교수의 음식이야기] 갈비집의 시대별 성장과정
  •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kyou2001@hanmail.net
  • 승인 2023.01.0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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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 중앙신문=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 1910~1930년대... 근대적 한국음식점의 태동은 1907[이문설렁탕] 으로부터 출발한다. 50년대 무교동의 추어탕집, 60년대 청진동의 해장국집, 오장동 냉면집, 70년대 장충동 족발집, 신림동 순댓집, 무교동 낙지골목, 80년대 신당동 떡볶이집, 신림동 순댓집, 회기동 파전골목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있어서의 음식점의 발달은 한국 고유의 전통음식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변천을 거듭해 왔다.

갈비구이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해왔다. 1939년경 서울 낙원동에 있는 평양냉면 집에서 낱개로 가리구이(갈비구이를 이르는 옛말 고조리서에 나오는 말)를 팔면서부터 쉽게 사 먹을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 갈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냉면집에 대해서 고, 조풍연(수필가, 한국일보 편집국장 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냉면집은 서울에 사는 이북 사람들이 즐겨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그 뒤 이름이 나서 한밤인 자정 때쯤이 가장 바빴다고 한다. 자정 때는 극장이나 요릿집, 카페, 바 등이 파하는 시간이다. 술 깨는 데에 냉면이 좋다하여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요릿집에서 놀다가 찾는 무리도 많아서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에 냉면 한 그릇에 20, 특제가 30전이고, 갈비가 한 대가 20전이었는데, 갈비는 연한 암소 갈비였다. 냉면을 보통으로 시키고 갈비 두 대를 시켜 먹으면 모두 60전이었다고 하였다.

1950~1960년대... 6·25 전쟁의 폐허를 복구한 후 기존의 식당들도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당시의 서울의 음식점 수는 170여개로 추산되며 대부분 대중음식점이었고 밥집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갈비구이를 취급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1957년 서울 근교 벽제 갈비집이 문을 열게 된다. 그 갈비집의 주인인 고상화는 평소에 수원 화춘옥에 자주 들러 갈비를 먹고 가곤 하였는데 언젠가는 갈비집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곳이 서울에 오늘날과 같은 갈비집을 성행하게 만든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벽제갈비라 하고 벽제갈비 옆에는 늘봄농원이 개업하였고 점차 서울로 뻗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으로 보더라도 갈비구이의 원조는 수원에서 파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재규,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수원갈비 역사성에관한 연구)

1970~1980년대... 1963년경부터 벽제갈비는 본격적인 갈비집으로, 야외 예식장으로, 공원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장흥 유원지와 연계되어 관광 유원 단지가 되었다. 처음 벽제에 갈비집이 생기자 서울의 식도락가들은 벽제에 가서 갈비구이를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서울의 기존 식당 등에서도 이때부터 갈비구이를 취급하게 되었다.

근대적인 한식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 일반 대중음식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서울을 예로 들면 용금옥(1930) 한일관(1934) 청진옥(1935) 조선옥(1937) 안동장(1940) 남포면옥(1948) 하동관(1948) 낙동강, 한국회관, 삼오정, 등이며 이후 진고개(1963) 일억조(지금은 금호그룹 본사 사옥이 들어서 있음) 대림정 등이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말까지 한강 이북지역에서 이러한 식당들은 성황을 이루었다. 경제 사정과 건설경기가 좋았던 무렵이라 장사가 아주 잘 되었고, 식당 주인과 주방장들은 대부분 요정 출신들이며 갈비구이라는 색다른 방법의 조리를 취급해 본 경험이 없었으며, 60년대 이후에나 갈비조리법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기존 식당들에서는 대부분 메뉴가 불고기, 갈비탕, 설렁탕, 곰탕 변형된 어복쟁반(궁중음식), 추어탕, 등 전골류의 식사가 많았으며 당시의 영업형태는 한일관, 진고개, 일억조 등 은 한식뿐 아니라 일식을 함께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의 강북지역에 있던 모든 식당들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장가가 잘 되었다. 특히 60년대부터 갈비구이를 취급하기 시작한 이후에 장사가 더욱 잘 되었다. 이렇게 갈비구이라는 메뉴가 수원에서 벽제로 벽제에서 서울 중심권으로 이동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수원갈비에 푹 빠져있을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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