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교수의 음식이야기] 수원갈비의 성장과정과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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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교수의 음식이야기] 수원갈비의 성장과정과 배경
  •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kyou2001@hanmail.net
  • 승인 2022.12.2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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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 중앙신문=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 수원갈비의 유래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이귀성씨가 화춘옥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시작한 것이 수원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1930년 수원시 팔달구 27-1번지에서 형과 동생 삼형제가 화춘제과라는 과자점을 운영하다가 194511월 독립하여 갈빗집을 개업했다.

당시 수원 영동시장에는 전국의 쌀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쌀의 거리를 이루었는데 이곳을 '싸전거리'라고 불렀다. 이 싸전거리에 식당을 차렸기 때문에 쌀미()자를 써서 미전옥이라고 식당 이름을 지었다. 이후 1953년 영동시장이 화재로 인해 팔달구 327-1번지로 이전했다. 이후 2년 후에 인근에 새로운 곳에서 목조건물을 신축하고 상호를 화춘옥이라 바꿔 달았다. 화춘옥(華春屋)이란 상호는 일제 강점기 화춘과자점에서 유래됐고, 이런 화춘옥에서는 처음 해장국을 시작하면서 이익을 못 보다가 갈비에 양념을 무쳐 숯불에 구워내면서 갈비를 팔기 시작했다. 50년에는 6 · 25와 함께 잠시 문을 닫고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 잠시 정착하게 되었다. 피난처인 부산에서 현지인들에게 갈비 조리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해운대갈비라는 이름으로 60년대와 70년대 한참 인기를 끌기도 하였다.

54년 다시 수원에서 화춘옥을 복구하여 영업을 이어가다가 자유당 말기 이귀성씨는 운영상 문제가 생겨 잠시 영업을 중단했는데, 이후 그의 아들 이영근씨가 2대째 화춘옥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그는 갈비 굽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경영에 치밀함을 보인 끝에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게 되었다. 이렇게 화춘옥이 갈비구이로 유명해지자 그 주변에 60년대부터 갈빗집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해서 싸전거리는 갈비구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냉장시설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소의 도살과 갈비의 양은 그날 소비할 것만 작업하여 다 팔면 식당문을 닫았다.

날로 성장해 가던 화춘옥을 비롯한 싸전거리의 갈빗집들은 1979년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이전하게 되었는데, 수원 외각 지역에서 다시 갈비촌이 형성됐다. 그곳이 전, 수원지방법원사거리를 중심으로 대형 갈빗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곳이다. 영동시장 화춘옥이 있던 자리에는 백화점이 들어섰으며 화춘옥은 역사 속으로 사라 저버렸다. 수원갈비의 역사는 우리나라 갈비구이의 효시이며 우니라 갈비구이가 태동한 곳이 수원이다.

오늘날도 갈빗집이 가장 많은 곳도 수원이며, 수원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대표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원갈비의 조리사 인맥은 이귀성씨를 효시로 하여 문이근, 임세근, 조명구, 이원길, 이후던, 서승길, 김병천, 곽영진, 김경일, 이천우 등 그 수를 헤아릴순 없지만 수원갈비를 만드는 기능 보유자들은 그 인맥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수원갈비의 성장배경은 지리적인 이유에서 그 성장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수원은 예부터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산들이 모두 모이던 곳이다. 경기 남부지역에 위치한 곳으로서 서쪽으로 남양만의 해산물 남서쪽의 평택 화성의 특산물과 용인, 안성, 여주, 이천의 곡창지대가 근접해 있어 먹거리 문화가 풍부했다. 인근의 농수산물의 집결지가 수원이었으며 수원 인근의 도살장(용인, 남양, 발안, 배양리)은 육류의 보급처 이기도 했다. 수원의 우시장은 전국 3대 우시장 중 하나였으며, 특히 수원의 우시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장날이면 각지에서 모여든 소장수와 농민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전국에서 유명한 갈비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됐다. 수원의 우시장은 조선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수원영동시장은 쌀의 집합처였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먹거리문화가 형성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기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도시기반이 최상이었으며 정조시대부터 계획된 신흥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수원에서 갈비구이가 발달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시장을 비롯한 도살장이 인근에 많이 있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갈비구이는 원래 양갈비였다, 현재와 같은 한 쪽으로만 포를 떠서 저미는 것이 아니라 갈비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저며내는 양갈비(양쪽으로 포를 뜨는 것)의 형태였다. 70년대 후반까지 서울 4대문안에 있었던 유명한 한식당(일억조, 진고개, 한일관, 성산회관 등)에서는 모두가 간장 양념에 양갈비 형태로 포를 떠서 저민 다음 양념에 재웠다가 판매를 하는 형태였다. 70년대 후반 강남 지역으로 대형 갈빗집이 생겨나면서 외갈비로 포를 뜨고 다이아몬드 모양의 무늬를 넣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수원갈비의 유래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이귀성씨가 '화춘옥'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시작한 것이 수원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사진은 화춘옥 상량식 모습. (사진제공=이재규 문경대 교수)
수원갈비의 유래는 1940년대 수원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이귀성씨가 '화춘옥'이라는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시작한 것이 수원갈비의 시초가 되었다. 사진은 화춘옥 상량식 모습. (사진제공=이재규 문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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