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교수의 음식 이야기] 우리나라 육류문화의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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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교수의 음식 이야기] 우리나라 육류문화의 발달사
  •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kyou2001@hanmail.net
  • 승인 2023.02.1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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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이재규 문경대 교수(음식 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하였을까?

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부여에 소가 있다고 하였으니 기원전 후 이 땅에 소가 널리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유리왕 때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사람이 끌었는지 가축을 이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위서(魏書)에서는 밭을 가는데 말을 쓴다고 하였다.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의하면 처음으로 우경을 하였다는 기록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소는 스스로의 커다란 힘에 의하여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수레를 끌게 되었다. 소는 동력원으로 이용됨으로써 농토가 넓어지고 농경효과가 한결 높아진 계기가 되었다.

가축을 도살하는 의식은 신에 대한 공물관념(供物觀念)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이유라고 만은 볼 수 없다. 인류가 공동으로 가축을 먹기 위하여 도살한데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원시 민족의 사냥 생활이나 목축 생활에서 야생의 짐승이나 가축은 그들의 중요한 식물이므로 이들의 피와 살은 그들의 생명이요 신성한 힘의 원천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인간 사회는 혈연집단인 씨족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모여서 신성한 동물을 도살하여 식사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식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372) 때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백제에는 침류왕(384) 때 들어왔다. 신라에서는 처음에 불교를 배격하였으나 이차돈의 이적에 의하여 법흥왕 때 비로소 공인되었다. 불교는 점차 상류층에 퍼져나가고 마침내 정치에 결부되어 백성들의 식생활을 크게 규제하게 되었다. 불교가 식생활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육식계(肉食戒)라고 할 수 있다. 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면 불죄를 받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법흥왕 16년에 살생 금지령이 내렸고 백제 법왕도 살생을 금하고 사냥이나 고기 잡는 기구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라고 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원광법사는 세속오계의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이것은 신라 고유의 정신적인 표상이고 화랑의 정신이 되었다. 불교에서는 살생엄금인데, 원광법사의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가르침은 동물의 번식기에는 살생을 하지 말고 자질구레한 벌레를 죽이지 말라고 하여 육식금지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해지고 육식은 생활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자연적으로 채식위주의 식생활로 바뀌어 불교의 차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와서는 도살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1123년에 중국에서 고려를 방문하여 기행문을 작성한 서긍이란 사람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기록한 것을 보면 양과 돼지를 네 다리를 묶고 이글거리는 불위에 그대로 내던지고 만일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죽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죽은 가축을 배를 가르기 때문에 창자가 온통 잘라져서 오물이 흘러내리고 이것으로 요리한 국이나 구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기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고기 다루는 솜씨가 이렇듯 서툴렀던 것이다. 그러나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려후기 와서는 고기 다루는 방법과 육식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고려를 정복한 원 세조는 고려를 병참기지로 삼고 일본을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원나라의 둔전병(屯田兵)이 머물게 되었다. 경작과 식료를 위하여 농우가 필요하였으니 고려 원종(1271) 때 농우 6천두를 고려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공급할 만큼의 소가 이 땅에는 없었기 때문에 곽여필을 몽고에 보내어 실정을 호소한 결과 농우 징발에 실패한 몽고인은 그들의 발달된 목축기술을 발휘하여 농우 증식을 꾀하게 되었다. 몽고인들은 제주도가 목장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고려에 와 있던 다루가치 는 목축에 능한 몽고사람과 말 160, 우량 품종의 소를 이끌고 제주도에 와서 목장을 개설하였으며, 제주도뿐만 아니라 둔전병의 주둔지와 일반 백성에게도 농우증식을 적극 권장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능란한 도살법과 고기 요리법을 발휘하여 즐겨먹게 되었고, 충렬왕 27년에는 원에 우육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여말의 것으로 보이는 중국의 노걸대에는 고기 한 근을 사되 살코기가 아니고 갈비 붙은 고기를 산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살코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고려인들이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와서는 내장이나 갈비고기마저 즐겨 먹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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