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신문=문학박사 문재익(전, 강남대 교수) | 심성의 사전적 의미는 ‘타고난 마음씨’로 유의어(類義語)에는 ‘마음, 마음씨, 심(성)정[心(性)情]’이며, 불가(佛家)에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本體:본 바탕)’라고 한다. 그런데 인성(人性)은 사람의 성품(性品:성질과 됨됨이, 성질과 품격), 품격(品格: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다. 한마디로 인성(인간성)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의 특성’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이고, 심성은 선(善)과 악(惡), ‘착 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말하는 것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통 말 할 때 ‘인성이 좋다, 나쁘다’, ‘심성이 착하다, 곱고 여리다’라는 말을 쓴다. 심성의 사자성어에는 빙청옥결(氷淸玉潔:얼음같이 맑고 깨끗한 심성을 비유적으로 말함)과 익자삼우[益者三友:사귀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세 가지의 벗, 심성이 곧은 사람, 믿음직한 사람, 문견(聞見:듣고 보아 얻은 지식, 견문)이 많은(넓은) 사람이다.]가 있다.
유대인의 생활규범인 탈무드에서는 선(善)과 악(惡)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구가 대홍수에 잠겼을 때, 온갖 동물들이 노아의 방주를 타러왔다. ‘선(善)’도 방주를 타려고 달려왔다. 그러나 노아는 ‘나는 짝이 없는 것은 태우지 않겠다.’ 고 말하며 ‘선’을 태워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은 할 수 없이 숲으로 되돌아가서 자신의 짝이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결국 ‘선’은 ‘악(惡)’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이때부터 ‘선’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흔히들 말하는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무엇이며, 어느 것이 더 타당할까?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善)한 것 인데, 이 선한 본성에 악(惡)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외물(外物:바깥 세계의 사물)에 유혹 때문이라는 주장이며,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은 인간의 도덕성이 선천적인 것을 부정하며 사람의 성(性:성질)은 악(惡)한 것이고 선(善)은 인위적(人爲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주장은 연륜이나 경륜이 있는 사람들은 둘 다 부정(不正)할 법 하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이 악해지고, 악한사람이 선해진다는 환경적 요인보다는 오히려 ‘타고 난다’는 말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전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사전적 정의에서 심성을 ‘타고난 마음씨’로 ‘타고난’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지 않은가?
성서 마가복음 7장 21~23절을 인용한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렇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이 나와 행해지는 것들이다.’ 특히 표독(慓毒:사납고 독살스러움)과 속임, 기만, 시기와 질투, 비방과 험담, 욕심과 탐욕, 고집불통, 아집(我執), 집착(執着) 등이 가장 일상에서 자행(恣行:제멋대로 해 나감)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 ‘심성’이라는 잣대를 어디에서 가장 중요하게 들이대어야 할까? 부모, 형제야 천륜이 맺어 놓았으니 설령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친구, 사회, 직장이나 조직에서는 솔직히 나 싫으면 그만두고 떠나면 된다. 그러나 한 가정을 꾸려 나아가야 하는 배우자는 선택 시, 심성을 최우선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중에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 피해가 고스란히 가기 때문이다.
‘심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변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신체의 일부와 같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체의 일부야 성형수술을 통해 변화 시킬 수 있지만, 심성은 성형수술도 불가능 한 것 아닌가? 그리고 인성교육이라는 말은 해도 심성교육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심성은 집안 내림이고, 유전자의 문제이다. 단, 친가 쪽이냐, 외가 쪽이냐, 우성(優性)이냐, 열성(劣性)이냐? 문제일 뿐이다. 젊어서는 보통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도, 나이가 들어가면서(40대말전후) 서서히 정점(頂點)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물도 종자가 중요하고, 밭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도 그 이치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거의 진리이다. 요즈음은 결혼 전 교제 시, 상대의 부모 형제도 만나고, 집도 왕래하게 된다. 결혼을 결정하기 전에 맨 먼저 상대의 ‘심성’을 보아라. 기준은 무엇인가? 부모, 형제, 상대의 가정 분위기, 더 정확하게 보려면 삼촌들, 사촌들까지 본다면 세균을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세밀히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심성이 나쁜 사람과 혼인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바로 내 노년을 보는 거울이 될 것이다. 바로 내 노년에 당하고,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내 자식들도 똑같이, 그대로 닮을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때 늦은 후회는,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비참함과 비통함만 들게 될 것이다. 인생의 최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정혼 자(定婚者)를 결정하려 하거나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여!
이렇게 통렬(痛烈:날카롭고 매섭게)히 말하는데도 가장 중요한 ‘심성’이라는 기준을 제쳐두고 ‘인물이 좋으니까, 경제적 능력이 좋으니까, 학벌 좋고 좋은 직장 다니니까’ 등등 조건만을 따진다면 두고두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 속에 살아 갈 것이다.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 첫째가 마음이 편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올바른 자식들이다. ‘심성이 착하고 인성이 좋은 사람’은 현재는 조건이 다소 나빠도 얼마든지 살아가면서 조건이 좋았던 사람을 능가할 수 도 있는 법이다. 현실에서 그런 예도 흔하다. 한 번 더 강조한다. ‘심성과 인성을 먼저 보고 나서 가능성, 장래성 그리고 조건을 따져보아라.’ 명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