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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 중앙신문
  • 승인 2019.10.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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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고추밭에서 고추를 딴다. 엊그제 맞춘 안경을 고추밭까지 갖고 갔다.

안경을 쓰니 훨씬 눈이 밝다. 또렷하다. 거리 측정이 정확해 고추를 따는 내 손놀림이 빨라진다. 언제나 아내를 따르지 못했는데 아내의 속도를 추월하다니?

일주일 전 안과에서 시력검사를 하니 좌안 0.2, 우안 0.3. 이게 뭐냐. 이거 완전 장님일세. 안경을 맞춰? 그렇지 않아도 하루 종일 돋보기를 쓰다 벗으면 세상이 뿌연게 흐릿했다. 장시간 돋보기에 얽매였다가 풀려났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30여 년 전, 처음 돋보기를 맞추었을 때도 너무 오래 돋보기만 쓰지 말고 가끔 벗고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편하게 해주란 주문을 받았지만 뭐가 그리 바쁘고 할 일이 많은지 돋보기를 거의 벗지 못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벗으면 세상 흐릿한 게 정상적인 시력이 아니더라도 돋보기에 익숙했던 눈이 평상안으로 돌아오는 눈조리개의 원대복귀 과정이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돋보기를 보기의 주식으로 알고 매일 안경을 쓰고 책 읽고,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살아온 게 무려 30여 년. 책 읽기나 컴퓨터 볼 때만 돋보기를 쓴 것도 아니다. 돋보기가 보기 생활 전반을 차지하다 보니 운전 중에도, TV 시청 중에도, 돋보기 쓰고 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TV도 돋보기를 쓰고 본다고 하니 안경 판매원이 웃는다.

“안 돼요. TV용은 따로 맞추어야 해요.”

못 들은 체했다. 그거 맞춰봐야 3, 4만 원이다. 돈보다 안경 두 개 가지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허구헌 날 안경 때문에 가방을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안경두 개를 어떻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는가. 그래서 원거리 안경을 구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과에서 시력 점수 0.2, 0.3을 받고 보니, 생각에 뭔가 흠이 있는 것 같아 기어이 원거리용 안경을 맞추었다. 그리고 썼다. 아- 세상 이렇게 밝은 걸. 그래 봤자 시력 겨우 0.6. 젊어 좌안 1.5, 우안 2.0이었을 시절의 감각은 어떠했을까. 실로 아까운 시절이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니 훨씬 밝아졌다. 항상 침침하던 시야가 또렷하고 밝다. 그걸 모르고 몇십 년 동안 침침하게 살았다니. 안경 흔한 이 세상에서도 놀라운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에서 총독과 관리들에게 보여준 망원경의 위력은 어떠했을까. 저 멀리,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던 것들을 생생하게 눈앞에 반짝 들어다 놓아준 기막힌 요지경. 평생 렌즈를 깎던 스피노자, 뉴턴의 천체 망원경, 안경 쓴 고종 황제의 놀란 눈….

오래전 TV영화에서 본 늑대인간이 생각난다. 주인공이 야간 운전을 하다가 죽어가는 늑대를 발견한다. 늑대를 안고 치료하려는데 아차 물리고 말았다. 물렸다기보다 늑대가 이빨로 주인공의 몸속으로 무언가 넣어 주려는 듯, 심어 주는 듯 은근히 스윽 물었다. 다음 늑대를 어찌어찌하고 집으로 돌아와 늦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눈을 뜨자 갑자기 시력이 밝아졌다. 세상이 평상시의 세상이 아니었다.

별천지.

주인공의 눈이 늑대의 시력으로 발현되어 세상이 보통 밝아진 게 아니었다. 일생동안 느껴보지 못한 또 다른 시각이었다. 밝고 또렷한 새로운 세상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의자에 앉는 게 아니라 책상 위로 뛰어 오르고,… 모든 감각, 모든 운동신경이 늑대의 그것으로 변화된 예민한 행동이었다. 초인간적 감각의 혁명이었다. 보기는 물론 듣기, 말하기,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 손놀림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안경 하나로 시력의 획기적인 혁신을 이룬 것처럼 오감을 총체적으로 바꾸어 놓으면 어떨까.

파우스트. 그것이 오래전 괴테가 쓴 파우스트가 아니고 무엇이냐. 인간의 오감과 정신을 청춘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파우스트가 아니라도 메피스토펠레스 앞에 영혼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리라.

그런데 인간은 이미 늙음에서 젊음으로 원대복귀 시키고 있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경이 그렇고 보청기를 만들어 6, 70대에서 2, 30대로 돌려놓았으며 썩고 삭아 문드러진 이는 빼버리고 임플란트를 심어 청춘으로 돌려놓았다.

다음은? 코, 후각 그리고 감각이다. 그러면 오감이 모두 젊은 2, 30대로 돌아간다. 가능할까? 지금 추세라면 가능할 것이다.

돈이 충분하다면 수명은 의학의 발달로 한없이 늘어날 것이란다. 장기는 적응 가능한 동물의 그것으로 대체될 것이며 교통사고로 부러진 뼈는 보철로.

너도 나도 아이언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터미네이터가 되어 천년만년 누리리라.

과학 만세!

인간 승리!

안경 만세!

그러나 인간의 정신사는 과학의 순기능만을 보지 않는다. 역기능을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식인이라면 모든 분야에서 비판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한다고 했다. 영화 ‘마이너리티 보고서’에서 주인공은 과학의 독주를 거부하고 ‘아일랜드’는 사육되는 대체 인간의 반란을 그렸으며, 보르헤스의 ‘지친 자들의 유토피아’는 인간 미래의 어두운 종말을 보여준다. 인간은 독주獨走를 방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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