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살떨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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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살떨지 마
  • 이상국  webmaster@joongang.tv
  • 승인 2019.11.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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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이상국 (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이상국 | “작년만 못해. 작년까지만 해도 거뜬하게 로터리를 쳤는데 올해는 안 돼. 힘만 들고…. 못하겠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하소연이다. 나이 칠십이 넘었으니 이제 농사에서 은퇴할 나이도 됐다. 어느 해, 이웃아저씨가 이젠 일하는 게 겁난다고 농사를 젊은 사람에게 일임하는 것을 보고 논물이나 보고 모든 일은 기계로 하는 걸 뭐가 겁난다고 그럴까 했는데 아니다. 내게도 은퇴할 순서가 바락바락 따라오고 있다.

힘이 든다. 아침에 긴 장화 신고 두어 시간 모를 잇다 보면 배가 고프고 정신없이 피곤하다. 더구나 장화가 펑크가 나, 물이 새 막내아들의 것을 신고 나섰는데 어찌나 큰지 그걸 푹푹 빠지는 논에서 신고 헤매다 보면 지친다. 지친 몸 이끌고 집에 와 아침 먹고 나면 매사가 귀찮다. 그냥 TV나 보다 잠을 자면 딱 좋겠다. 이처럼 나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1945년 일본 원폭 피해로 아내를 잃은 핵물리학자 나가시 다가시의 글 ‘세 노인’을 읽다 보면 아니다.

아직도 힘써 일해야 한다. 수족을 쓰지 못할 정도까지 죽어라 일해야 한다. 늙은 미국인이 원양어선을 타고, 어린 손자들은 젊은 아들 며느리가 길러야 손자들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연금이나 보험금은 아직 손댈 때가 아니다. 동양인들은 도연명이 쓴 미문의「귀거래사」에 홀려 늙은 기색만 보였다 하면 손주 끼고 노는 소일에 힘쓰고자 은거사상에 빠지고 연금이 모자라다 싶으면 자괴감 무릅쓰고 시간제 공무원으로라도 복귀할 틈이 없을까 기웃거리는 추태를 보인다.

자, 하나하나 따져보자. 나를 해부하고, 조사하고, 연구해 보자.

아버지는 내가 시골 면서기나 초등학교 선생을 해, 집에서 밥 먹고 출퇴근하며 농사짓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적중했다. 나는 면서기를 하며 농사를 지었다.

일과 시간엔 사무실에서, 아침저녁엔 논두렁에서. 언제나 바빴다. 아침 논에 나갈 때도, 밥 먹고 사무실에 출근할 때도. 언제나 아내를 닦달했다. 아침밥이 늦었다고 닦달, 출근길에 옷을 못 찾아 닦달, 시간 없는데 국 뜨겁다고 닦달, 구두 안 닦아 놓았다고 닦달….

그뿐이 아니었다. 사무실에선 논두렁 걱정, 논두렁에 선 사무실 걱정. 그러니까 양쪽 다 야무지게 끝장을 보지 못하면서 언제나 바빴다. 그렇게 대강, 대강, 엉성하게 일 년을 넘기고 또 일 년을 넘기다 면서기에서 퇴직을 하고…. 이제 농사일에 전념을 해야 하지만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 부동산을 한다, 예총 사무를 본다, 핑계를 만들어 지금도 논두렁과 사무실 사이에서 허둥지둥 언제나 남 보기에 바쁜 척할 뿐만 아니라 현역 시절 버릇이 아직도 남아 아내를 닦달 중이다.

부동산은 적자운영이라 지난 달 문을 닫았다. 하면 할수록 가면 갈수록 손해를 보니 잘한 일이다. 그러나 농사에 전념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악습 두 가지-읽기, 쓰기-아주 고약한 버릇이다. 특히 읽기는 남들 좋은 말로 주경야독? 웃기는 말이다. 그것도 힘이 있고 나서다. 나처럼 약골이 무슨 주경야독. 한 가지나 제대로 할 일이다. 봄부터 쓰기 시작한 책 한 권이 끝나는 날 모두 때려치우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 차려 농사에 전념하는 것이다. 농사 관리기 교육을 제대로 받아 직접 운전을 하기로 한다. 밭가는 것, 로터리 치는 것 일일이 트랙터 부탁도 치사하고 해 놓아도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손보아야 한다. 그러니 관리기는 직접 운전해야 모든 일이 순조롭다.

관리기는 내 손으로 운전한다! 맹세!

다음, 생물학, 작물생리, 재배원론, 비료학, 병충해방제학, 잡초방제학 등 농업기초 지식을 수차례 읽고 또 읽어 막힘없이 대처할 능력을 갖춘다. 다음, 농사에서 수지맞는 작목은 무엇인가. 품종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어떻게 심고, 기를 것인가. 판로는? 제대로 알고 똘똘한 농사꾼이 되는 것이다. 농협과 친해야 하고, 농촌지도소와 사이좋게 지낼 것. 궁금한 건 즉각 해결한다.

“모르면 물어라 완전무결!”―내가 현역으로 근무했던 1960년대 공군 구호다.

항상 일등을 좋아했다. 이번엔 농사꾼도 일등이 되어 보는 것이다. 야무지게 대들고 매몰차게 일하다 보면 멀지 않아 일등 농사꾼 되고 만다. 그게 늙은이 뱃가죽 모양 늘어지지 않고, 빨랫줄처럼 팽팽히 사는 법. 열심히, 그리고 잘 사는 법이다.

어디서 엄살을 떨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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