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㊾ ‘송도의 금강’으로 불린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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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의 향수를 찾아서 ㊾ ‘송도의 금강’으로 불린 청량산
  • 남용우 선임기자  nyw18@naver.com
  • 승인 2024.03.0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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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우 선임기자
남용우 선임기자

| 중앙신문=남용우 선임기자 | 연수구의 가운데 우뚝 서서 송도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淸凉山)은 옥련동과 청학동, 동춘동 일대를 감싸고 있는 산으로, 산세가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해발 172m에 불과한 얕은 산으로 정상까지 20분 정도면 오르지만 박물관 뒷길로 올라 능선을 따라 청학동까지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인천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걷는 산행에 매료돼 인천에서 산악인들이 제일 많이 찾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청량산에는 2개의 절이 있다. 산에 올라 바다를 향해 오른쪽 방향인 옥련동에 호불사가 있고 왼쪽 방향인 동춘동에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다. 흥륜사는 634년 전 나옹화상이 개청해 아시아를 비롯,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찰이다. 반면 호불사는 1958년 위장병을 앓던 김현구 씨가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 지내면서 건강을 회복한 뒤 지은 청룡사가 1974년 호불사로 개청 됐다. 청량산을 등산할 때 옥련동 호불사 방향에서 올라가 동춘동 흥륜사로 하산하면 2곳의 절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맛을 즐길 수 있다. 청량산은 청룡산, 청릉산, 척량산 등으로도 불리는데 조선 중종 때‘신 증동국여지승람’이나 그 뒤에 나온 ‘인천부지’등에 보면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 ‘빼어나다’라는 말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일본인들이 한국을 오가는 관광객들을 위해 인천의 모습을 예쁜 색깔로 정밀하게 그려 만든 그림지도‘경승의 인언’에 청량산을‘송도의 금강’이라 이름 붙여 놓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규모나 경치 면에서 전혀 비교되지 않지만 경상북도 봉화에 있는 도립공원 청량산의 경우도 예로부터 ‘소금강산’이라 불려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곳도 같은 이유에서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바라본 청량산. (사진제공=연수구청)
인천시립박물관에서 바라본 청량산. (사진제공=연수구청)

청량산이라는 산 이름을 처음 지은 사람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으로 전해 오며, 그가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이곳에 흥륜사를 세우면서 이 이름도 지었다. 다른 전설에는 원래 청량산이 중국 산시성에 있어 오대산으로도 불리던 산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화엄종의 고승인 징관조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며 ‘내 법을 동쪽 해 뜨는 작은 나라에서 꽃 피우리라’고 예언했고, 이에 따라 그의 두 수제자가 백마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향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산의 중턱에까지 다다랐는데 더 이상 말이 움직이지 않아 이곳에 백마상을 세우고 산 이름을 중국에서와 같이 청량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반면 풍수지리적 입장에서는 청량산이 원래 척량산인데 청량과 척량의 발음이 같아서 와전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척량’이란 ‘금자로 땅을 재는 형국’ 즉 금척량 지형의 준말로 이 산의 모양이 그런 형세라는 뜻이다.

산 이름을 청릉산이라 하는 사람들은 이 산의 동쪽 기슭에 청릉이란 무덤이 있어 원래 산 이름이 청릉산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느 쪽도 명확한 근거는 없으니 이들 여러 개의 이유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생기게 한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낼 길이 없다.

요즘에는 등산인구가 부쩍 늘어 청량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1970년대만 해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운동선수들이 체련 단련을 위해 단체로 산에 오르는 경우와 조직폭력배들이 담력과 힘을 키우기 위한 장소로 많이 사용됐다. 필자의 후배인 김철호(56)씨도 1970년대 초 선배들을 따라 청량산에서 훈련을 받다가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했다. 본인은 갈비뼈가 부러진 이유를 끝까지 숨겼으나 병원비에 시달리던 철호 어머님이 철호 친구들을 끈질기게 추궁한 끝에 선배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치료비를 받아 냈다.

당시에는 훈련(?)을 받다가 부상을 당해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만일 발설을 했다가는 친구들에게 외면은 물론 비겁한 놈이라는 불명예 딱지가 꼬리를 물고 다녀 발설 자체를 치욕으로 알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 할 해프닝이지만 그 당시 의리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아름다운 멋으로 알고 사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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