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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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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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7.1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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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수필가,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농사일치고 힘들지 않은 것이 있겠느냐만 논두렁 풀깎기가 내겐 가장 힘든 일이다. 긴 논두렁을 폭염 아래 낫으로 깎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초기(刈草機)가 나와 쉬워졌지만 달달거리며 제멋대로 날뛰는 원동기를 등에 지고 조심조심 움직여야하고, 맹렬히 회전하는 칼날에 정신차려야 하며, 앵앵거리는 소음을 견뎌야하니 쉽게 덤벼들 일도 아니다.

논두렁 풀, 저걸 어쩔까 고민하던 중 이웃 논두렁이 빨갛게 탄 걸 보고, 이른 새벽 제초제를 뿌린다. 이슬 치기에 뿌리면 농도가 떨어지고 굴러 떨어지는 이슬 때문에 약효가 저하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분무된 약이 이슬에 닿는 순간 표면장력을 깨뜨리면서 식물체를 순식간에 도포해 약효를 배가시켜 효과적이다.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한낮 땡볕이 무서웠다. 시원해 좋다.

뿌린 후 3, 4일 지나니 징후가 뚜렷하다. 약을 맞은 자리와 비켜간 자리의 경계가 면도날로 그은 듯 명료하다. 중학교 다닐 때, 2-4D란 제초제가 나왔다. 광엽식물만 죽이는 약으로, 생장점이 공급되는 영양에 관계없이 몇 십 배로 팽창해 신진대사의 균형을 깨 고사(枯死) 한다고 배웠다. 40여 년이 지났다. 종류도 다양하고, 내용도 풍부해졌다. 전멸에서 선택으로 유제에서 입제로….

내가 뿌린 제초제는 밀림에서 암약하는 베트콩을 색출하기 위해 비행기로 살포하여 산하를 초토화 시킨 약으로 그 해(害)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딸 손자까지 유전으로 전이되는 지독한 놈이다.

제초제의 해악을 안다. 그러나 과학을 믿는다. 10년 연배의 선배 한 분 계시다. 풀 뽑기로 여름을 나시는 분이다. 만나면 싸운다. 꼭 손으로 뽑아야 된다. 제초제 안 뿌리고 어떻게 농사짓습니까. 이번에는 논두렁에 제초제 뿌린 자랑을 하니, “있을 건 다 있어야 해”라고 하신다. 새겨들으면 논두렁의 사소한 잡초일망정 있을 곳에 꼭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겉귀로 들었다.

모내기 전, 초기 제초제로 잡초를 잡았지만, 올미, 알방동산이, 벗풀, 사마귀풀, 너도방동사니, 올챙이고랭이, 물달개비, 가래…. 잡초란 잡초가 어느 틈에 싹트고, 신나게 자라는 걸 보면 ‘농사일은 잡초와의 전쟁’이란 말이 맞다. 도리 없이 중기 제초제를 뿌린다. 일주일이 지나 이 풀이 오그라들고, 뿌리가 썩어 죽는다.

3, 40년 전만 해도 논 3,000평 김매기를 하려면 10여 명 일꾼이 필요하고, 점심 한 두 광주리 내와야하며, 아침, 저녁(또는 겨누리)이란 게 있어야 하고, 술, 담배에…, 그것도 때에 척척 맞아야 한다. 밥시간이 늦거나, 발 헛디뎌 광주리를 논두렁에 탈기치는 날이면 그 낭패는 당해 본 사람이나 안다. 여북하면 아내가 한두 달 봉급을 덜 타지 농사는 못 짓겠노라 했을까.

제초제가 시시콜콜한 대소사를 해결하니 얼마나 고마우냐. 농사가 기계화, 생력화(省力化)되어 시골 정취가 옛날만 못하다느니, 낭만이 사라진 시골이라느니, 자연환경보호 차원에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궁핍한 농사꾼 입장을 헤아리기나 하는지.

봄비 내리는 밤, 귀가 길에 개구리 떼가 아스팔트 위에 나와 앉았다. 수천수만 마리 개구리의 생명 앞에 차를 세웠다. 집에선 아내가 난산(難産) 중이다. 어느 쪽을 택할까.

개 한 마리 엄동설한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어 죽었다. 사고 차(車)는 사라지고, 10분지나 개의 시체도 사라졌다. 동네 가마솥에 보신탕을 팔팔 끓는다. 눈 내린다.

잔인한가. 천성산 터널로 2조 5천억 세금이 날아간 건.

논두렁이 깨끗하다. 뿌리까지 죽이는 전멸제와 풀 안 나는 약을 섞어 뿌렸으니 논두렁 풀 걱정은 없다. 노동력을 최소화했고, 나 또한 편하니 얼마나 좋으냐. 내년에도 제초제를 뿌리리라.

비가 왔다. 장맛비다. 억수같이 왔다. 논두렁이 와장창 무너졌다. 망했다.

남의 논두렁은 괜찮은데 내 논두렁만 난리냐. 따져보니 이웃은 나보다 일찍 뿌리고 나는 장마 임박해 뿌린 차이다. 며칠 사이에 어린 풀들이 뿌리를 내렸으면 안전하고, 안 내렸으면 주저앉은 것이다.

제초제를 맹신한 벌이 혹독하다. 논두렁 밑에 깔린 벼의 손실은 차치하고, 흘러내린 둑을 쌓자니 중장비를 동원해야할 판이다.

선배님 말씀이 새롭다. “있을 것은 있어야.” 사소한 논두렁 잡초 뿌리를 무시한 죄.

사소한 것들의 반란이다.

사소한 것이 어찌 풀뿌리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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