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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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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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7.2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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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 중앙신문=중앙신문 | 어느 날 부터인가 일곱 살 손녀가 제 이름을 ‘여자 칠세 김준희’라고 해야 한단다. 갑자기 성별과 나이를 이름 앞에 붙이는 낯선 호칭에 온 식구는 황당해 졌다. ‘아니, 우리 유치원에 남자 오세 김준희가 있단 말이야.’ 한다. 그제 사 식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녀석이 제 엄마 품으로 파고들며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엄마 내 이름 누가 지었어?’ 하면서. ‘왜?’ ‘남자도 내 이름을 쓰잖아, 여자만 쓰는 이름이 아니잖아.’한다. 얼른 ‘준희란 이름이 너무 좋아서 서로 갖고 싶어 해서 그래.’ 라고 답을 해 주었지만 아이의 서운함은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아무 의미 없이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았다. 수백 번 불러보고 좋은 의미의 한문을 찾고 정말 심혈을 기울여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으로 누구보다 멋진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나와 남편의 소망을 가득 담아서. 준희 이름도 그랬고 큰 손녀 소희도 그랬다.

이름은 그렇게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는 동시에 이름을 짓는 사람의 소망을 담고 있다. 어느 풀 하나도 서로 같지 않으니 유일한 한 사람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하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대학교 때 우리 과에는 김영희라는 이름만 세 명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 뒤에 A, B, C를 붙여서 김영희A, 김영희B 이런 식으로 구별해서 불렀다. 지금도 친구들이 모이면 ‘김영희B가 ~’ 또는 ‘김영희C가~’이렇게 지칭한다.

난 아직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대면한 적은 없다. 같은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긴 한 모양인데 만나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고마운 일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누구와 구별되어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리라. 나만의 삶을 나답게 살다간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름을 준 사람의 소망이 깃들어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존재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어린 것의 이런 문제제기로 식구들의 화제가 자연스럽게 이름으로 흘러갔다. 아이들 이름에 얽힌 뜻과 사연을 다시 집어주며 의미를 되새기다 보니 급기야 내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필 ‘순’자로 끝나는 내 이름은 그 당시 촌스러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시골출신 여자 이름은 거의 ‘순’자로 끝이 났으니 그럴 수 밖에. 난 드디어 내 아이들에게 내 이름의 당당한 의미를 공식적으로 해명할 기회를 얻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이름은 ‘은혜 惠’에 ‘대나무 筍’ 이야. 은혜롭고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이지.” 아이들은 합창을 하듯 ‘오올’ 소리를 냈다.

근데 내게 붙여진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는지 불안한 마음이 스치는 순간이 되었다.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 그 이름을 주신 분의 기대에 부응하며 이름값을 하며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새삼 이름에 배어있는 사랑의 깊이를 가늠하며 나도 모르게 속으로 움츠려들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이름으로 인해 우울한 준희를 위해 모두 상대의 이름 앞에 성별과 나이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여자 ○○세 ○○○ 밥 먹어, 남자 ○○세 ○○○이리 와봐.’ 이런 호칭을 사용하며 식구들은 모처럼 즐거워 졌다. 뾰루퉁 하던 준희가 환하게 웃으며 ‘여자 칠세 김 준희가 물 떠 올게요.’한다. 우리에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김준희’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구지 성별과 나이를 붙이지 않아도 ‘준희’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그래서 비록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만나도 자기만의 유일한 가치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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