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순 칼럼]염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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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칼럼]염색
  • 중앙신문
  • 승인 2018.03.1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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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수필가, 칼럼위원)

잊어버릴 만 하면 희끗거리며 뿌리부터 기어 나오는 은발을 감추기 시작한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엔 1년에 한 두 번이던 것이 요즘은 두어 달이 멀다하고 염색을 한다.

그나마 난 나은 편이란다. 친구들은 한 달도 못 견딘다고 하니 말이다. TV 화면에 염색하지 않은 머리로 나오는 어느 여장관이 참 매력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나는 아직 그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하고 오늘도 또 흰 머리카락 마다 검은 물을 들였다. 내가 동화 속에 나오는 백발 마녀처럼 보일까봐 두려워서, 그리고 아직은 조금 더 젊어 보이고 싶어서. 염색을 마치고 거울을 보니 너무 진한 물을 들였나 싶어 잠시 후회가 된다. 미용사가 건네는 ‘몇 번 감고 나면 자연스러워 진다’는 말을 위로 삼아 검은빛 머리를 다시 매만지며 거리로 나섰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앞을 향하여 걸어간다. 햇살에 반짝이는 사람들이 마치 거대한 물결 같다. 잠시 그 물결이 어지러워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아차 머플러를 두고 나왔구나.’하는 생각이 스친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며 문득 생각했다. 젊음도 두고 온 머플러처럼 돌아가서 다시 들고 올 수 있는 것이라면. 시간을 거슬러 걸어가면 그 길가 어디 쯤 잃어버린 젊음이 주인을 기다리며 앉아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해 보았다. 뒤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걸어 보는 것, 잠시 내가 흰 머리 하나 없는 젊은 머릿결을 휘날리던 시간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염색한 머리는 한 일주일 지나면 뿌리부터 다시 흰 머리가 밀고 나올 것이다. 그런데도 염색하고 난 오늘은 너무 진한 검은 색에 어색 하지만 잠시라도 산뜻한 느낌을 갖는다. 내가 이렇게 늙었나 하는 마음을 잠시 가리고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일까? 아님 나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을 젊은 척 속이고 있는 걸까? 어쩌면 서로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면서 그렇게 또 다른 물결로 출렁이며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머리카락만 시간을 거슬러 가고 내 주름진 얼굴은 그 뒤를 까르르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젊음이란 어느 날 내가 급하게 뛰어 가다가 잃어버린 머플러처럼 자꾸 잊혀 지며 멀어지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어느 길가에 세월의 물결을 타고 사라져 간 내 발자국처럼. 그래서 늘 뒤돌아보며 한 때 내 것이었던 푸르른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내가 언제까지 염색을 하며 지낼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언제부터 염색을 하며 살지를 젊은 날 몰랐던 것처럼. 그러나 그 염색의 시간조차 소중하기만 하다. 내가 아직 나를 다듬을 여유가 있고 그 체력이 되고 무엇보다 아직 그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흰머리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직은 잠시 젊어지는 그 기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그 시간 안에서 두고 온 머플러를 찾아 마음 시린 바람을 막아보듯 잠시 따듯하고 싶다.

아직 내가 걸어갈 길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늘도 걸어간다. 가끔은 어딘가에 두고 온 무엇인가를 가지러 뒤돌아 걸어가며 아주 잊고 영영 멀리 가지 않았음을 감사하기도 한다. 내 머리에선 아직 염색약 냄새가 난다. 흰 머리칼마다 듬뿍 바른 젊음의 빛깔로 나는 잠시 더 머물려 한다.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내가 천천히 늙어가기를 바라는 내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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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준 2018-03-15 19:00:03
아~ 글을 읽으면서 나도 내 젊음을 위하여 염색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젊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될듯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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